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곡자매 Mar 29. 2024

집주인이 자꾸 마당에 들어온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결혼 생활 9년 동안 몇 번의 이사를 했고, 제주 집은 우리 가족이 네 번째로 살게 된 집이다. 이사를 하며 만난 부동산 중개사, 임대인, 임차인들은 참 가지각색이었고, 이번 집은 이전 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세로 들어왔다. 제주까지 직접 오기가 힘들어 부동산을 통해 대리로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고 집주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부동산 중개사 사장님께 듣기로는 같은 단지 내 타운하우스를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봤던 2개의 집이 같은 주인이었다.


보통은 계약 후에는 집주인과 만나거나 연락할 일이 없는데, 이번엔 오히려 이사 후에 집주인과 접촉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1.

이사 다음 날, 인터넷 설치를 위해 기사님이 방문했다.


- 통신 단자함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이게 주택은 집마다 위치가 다르거든요. 혹시 집주인이나 부동산에 물어봐주시겠어요?


남편이 집주인과 통화를 하니, 집주인은 통신 단자함 위치를 알아보고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계속해서 찾아보던 기사님은 다른 집 예약이 잡혀 있으니 내일 다시 방문하겠다고 하고 돌아가셨다.

우리도 다른 일정이 있어 외출을 했는데 1시간 정도 지났을 때쯤 남편이 엥? 하며 휴대폰을 내민다.

우리 마당의 통신 단자함

[마당에 구멍 파두었고, 거기에 벽돌 올려놨어요]

집주인의 문자다.


- 우리 마당에 들어와서 파놨다는 거야?

- 그런 거 같은데?

- 우리가 집에 없는데 말도 없이 그냥 들어와서 파고 간 거야?

- 그런가 봐. 뭐지?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빠르게 대처해 주려고 그랬는가 보다 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그 일은 우리의 기억에서 잊혔다.





#2.

개들의 배변을 위해 마당에 나가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첫째가 베란다 문을 쾅쾅 두드리며 엄마 엄마~ 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 귀여워서 촬영을 하며 가까이 다가가니 방충망에 커다란 구멍이 몇 개 보인다.

집에 들어와 자세히 살펴보니 구멍의 개수도 많고 크기도 꽤 크다. 위치나 상처를 봐서는 아마 예전에 살았다던 대형견이 서서 박박 긁은 게 아닐까 싶게 세로로 긴 모양새다.


우리 역시 임차인인 동시에 임대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집의 이것저것 수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안다. 다른 방 창문의 방충망들은 작은 구멍이 몇 개 있는 정도라 적당히 보수해서 살기로 하고, 거실 방충망만 교체를 요청하기로. 남편이 부동산에 사진을 보내며 연락을 하니 집주인과 이야기해 보고 다시 전화를 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부동산에서는 연락이 없다. 남편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임대인분께서 방충망에 대해 답 없으셨는지 문의드려요]

[안녕하세요~ 말씀은 드렸는데 한번 더 확인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몇 분 후 부동산에서 온 문자.

[방충망은 죄송하게도 그냥 사용하셔야 될 거 같습니다~]

둘이 동시에 문자를 보고는 엥 하는 표정을 지었다.


- 아니 이 사진을 보고도 그냥 살라고? 여름에 모기 다 들어오게 생겼는데?

- 그러게. 황당하네.. 들어올 때부터 이렇게 돼있는 방충망인데 이걸 어떻게 그대로 살으라고 하지.


남편이 다시 문자를 보낸다.

[왜죠. 방충망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할 정도인데.. 처음부터 이랬어요.]


휴대폰을 든 채 둘이 어쩌지 하며 이야기를 나눠도 별수가 없다.


- 근데 부동산에서도 무슨 죄야. 주인집에서 안 해주겠다고 하면 난감하겠네. 우째.

- 그러게. 집주인도, 부동산 사장님도 근처 살아서 서로 얼굴 붉히기 싫은데 참..

(부동산 사장님은 우리의 옆옆집에 살고 계신다)

- 그냥 일단 알았다고 하자. 부동산 사장님도 난감하실 듯.

- 응 알겠어. 그냥 알겠다고 문자 할게.


남편이 다시 빠르게 문자를 이어 보낸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보수테이프로 구멍 막아 써볼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띵동! 문자 답장이 왔다.

네.




#3.

다 같이 차를 타고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 멀리 우리 집 마당에 웬 성인 남자 하나가 두리번대고 있는 것이 보인다.


- 우리 집 마당에 누가 들어와 있는데?

- 정말? 엥? 누구지


집 앞에 차를 댄 후 남편이 먼저 내려 마당에 서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고, 남자는 남편에게 옆집을 가리키며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둘째의 안전벨트를 풀며 궁금해서 목을 쭉 빼고 쳐다보다가 대화가 길어지는 듯 해 내려서 가본다.


- 여보. 우리 집주인 분이시라네.

- 아아! 안녕하세요.

- 네 계약할 때 얼굴을 못 봤네요. 옆 집 공사 중인데 이 집도 실리콘 터진 게 있어서 하나 보수할까 했어요. 혹시 뭐 살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남편이 이때다 싶었는지 말을 꺼낸다.

-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거실 방충망에 구멍이 좀 많이 나있어서요. 교체해야 할 것 같아요.


오. 좋았어 남편. 지금이다. 지난번 부동산을 통해 한번 이야기를 했을 때 집주인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긴 한 것인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걸 주인집에 제대로 전달했으면 당연히 교체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내심 들었다. 반대로 우리가 임대인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교체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다 같이 마당에 서있으니 이야기가 될 것 같으면 실제로 보여주면 되겠다 싶어서 나도 옆에서 눈을 반짝인다.


- (웃으면서) 허허.. 그건 그냥 쓰세요.

- 네? 구멍이 좀 크게 나서요. 벌레가 들어올 거 같아요.

- (웃으면서) 그건 그냥 써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그거 하나만 바꾸겠어요.

- 아 네..


부동산을 통해 이미 전해 들은 눈치였고, 여러 번 이야기해도 똑같은 대답이 나오는 응답기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답지 않게 마무리되는 동안 먼저 뒤돌아 차로 다가간다. 평소 같으면 서서 이런저런 잡담도 한 두 마디 더 나누었을 텐데, 이 사람과는 이 정도 대화가 오간 것만으로도 말이 통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카시트에서 잠이 든 둘째를 꺼내 안고 '저는 아이가 있어서 이만'이라고 말하듯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한다. 조금 뒤 뒤따라 들어온 남편이 이야기를 꺼낸다.


- 집주인 인상이 나쁜 사람 같진 않던데. 그렇지?

-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엄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인데 마당에 들어와 서성이고 있던 것부터 내가 생각하는 상식선의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 번 양보해 수리할 것을 발견해서 들어왔다고 해도 우리를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모습, 먼저 불편한 점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하며 이야기를 꺼내놓고 그냥 살라니.

"미안한데 그건 어려울 것 같다"도 아니고 "그냥 사세요" 라니..?


그래도 허허 웃으며 이야기한 것이, 그리고 우리가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집의 하자를 발견하고 수리해주려고 하는 모습 때문에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주 묘하게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사회생활을 좀 해보니 세상에는 나쁘기만 한 사람도, 좋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기도 하고.




#4.

첫째와 함께 킥보드를 타고 하교를 하던 길이었다.

코너를 꺾으면 세 번째에 위치한 우리 집 마당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우리 집 옆쪽에 누군가 사다리를 기대놓고 창문에 뭔가 작업을 하고 있다. 왠지 저 실루엣을 봐서는, 그리고 정황상, 지난번에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와 있던 집주인인 것 같다.

속으로 잠깐 고민을 한다. 갈등이 정말로 싫고,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도 싫고, 좋은 게 좋은 거지를 신념처럼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무렇지 않게 상대에게 꽤나 싫은 소리도 하게 되고, 스스로를 지키는 항의 정도는 나서서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갔는데 이번에도 모른 척 집에 들어간다면 우리를 만만히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마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가 남자를 올려다보고 묻는다.


-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거예요?

- 아, 여기 실리콘 터진 데가 있어서 고치고 있어요.


역시나 집주인이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집에 있는 남편한테는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으며 남편에게 묻는다.


- 집주인이 우리 집 옆에서 뭐 고치고 있는데 알고 있어?

- 아니. 나 지금 밖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서 내다봤다가 깜짝 놀랐어. 언제 와서 고치고 있었지?


역시나. 남편은 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 위 창문에서 수리를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수리하고 있는 곳은 거실 한쪽 벽 위에 가로로 길게 창문이 나 있는 곳으로, 집에 들어와서 보니 저기서 들여다보면 1층 거실과 부엌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다. 창문 바깥으로 남자의 모습이 훤히 보이니 더욱 불쾌한 마음이 든다.


- 당신한테도 얘기한 거 아니었어? 아니 저 창문으로 우리 거실이랑 부엌 다 들여다 보이는데, 말을 하고 고쳐야 하는 거 아니야? 아직 커튼도 설치 못했는데.

- 그러게. 내가 나가서 이야기할게.

- 응. 애들도 있고 나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서울 것 같은데. 애 수유라도 하고 있었으면 어쩔라고.


둘째의 단유를 한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만약 단유하기 전처럼 거실에서 가슴을 내놓고 수유라도 하고 있었을 상상을 하니 소름이 끼쳤다. 남편이 겉옷을 걸치고 나가더니,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 왔어? 뭐라고 이야기했어?

-"죄송한데, 보수하시는 건 좋은데 이렇게 저희 집 작업할 때는 미리 얘기를 해주세요" 이랬지.

- 응, 그러니까 뭐래?

- 알았다고 이제 거의 끝났대. 근데 이 사람 좀..이상해. 왠지 알아?

- 왜?

- 내가 한번 더 말했거든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하는 것 같길래. "제가 집에 있었는데 너무 놀랐어요"라고. 그러면 보통 "죄송합니다"라고 답하잖아? "이제 안 할 거예요" 라네. ㅎㅎㅎ

- 와.. 진짜 이상하다.. 거봐. 좋은 사람이 아니라니까. 



우리는 그날 이후 몇 차례 더 집주인과 부동산중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대체로 이해할 수 없었던 집주인의 행동들 - 이상하다. 상식 밖이다 & 제주는 원래 이런 건가? - 신경 쓰지 말자. 이런 거에 감정소모할 필요 없다. - 근데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지? 등으로 흘러가며 끝났다.


그 주 주말, 첫째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신청해 둔 한라도서관에 방문했다가 눈길을 끄는 참신한 책 제목을 발견했다. 김신회 작가의 《나의 누수 일지》. 집에 누수가 발생하면서 생긴 이웃과의 분쟁을 다룬 에세이인데, 작가의 불편하고 분노하는 마음이 지금의 우리 상황과 감정과 비슷해서 책을 열었다가 빨려 들어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었다.

회피하고 싶지만 용기를 내서 불편함을 항의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고, 불편을 끼친 상대는 신경도 안 쓰고 연락도 없는데 나만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감정. 어떻게 더 내 화를 표현해야 저 사람이 반성하고 나에게 사과를 할까 하는 분한 마음과, 분란이 커질수록 감당해야 할 결과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같이 분노했다가 우울하기도 했다 하며 감정선을 함께 오르내렸다. 그리고는 마지막 결말에 생각지도 못하게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놀라운 책이었다. 책의 스포일러가 될듯하여 내용을 말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은 남편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1. 몇 가지 사건만으로 집주인을 너무 쉽게 '개념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러는 나는 얼마나 정의롭고 괜찮은 사람인가. 

당연하지만 세상에는 친절한 이웃들만 존재하지 않으며, 인생에는 언제든 생각지 못한 일들의 투성이다.

처음 겪는 낯선 상황에 대한 당혹감을 순간의 기지로 막을 수는 없지만 너무 쉽게 상대를 원망하거나 단정 짓지는 말자. 그리고 그것에 내 마음이 다칠 필요는 더더욱 없다.


2.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인생의 레벨업을 하는 계기가 된다는 발상의 전환.

주변의 분위기와 상대의 기에 눌리는 상황에서 내 생각을 명확하고 태연하게 입 밖에 내는, 실전의 장으로 생각하자. 이런 사건들을 통해 나는 아마 지금보다 조금은 더 대담하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어 가지 않을까.



+ 부쩍 이전에 살던 서울집주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실감하는 한 달이었다.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말도 없이 우리가 이사하기 전 집의 벽지와 페인트를 모두 수리해 놓았고, 신발장, 주방 등의 여분의 전구와 하이라이트의 청소 도구 등을 모두 채워놓고 나가셨다.

이사 후 첫 달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죄송하다며 마카롱을 사들고 집에 방문하셨고, 서로 연락을 할 일이 있을 때에는 보내신 문장 하나에도 배려와 인품이 느껴져 남편과 늘 문자를 보며 감탄했다.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이 분이랑 연락할 때는 나까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라고.


이사 후 그동안 집에서 잘 지내다 왔다고 기프티콘과 감사 문자를 드렸고, 그분의 답장에 우리는 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어찌 감탄하지 않으리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