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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2024 (2)

by 잡곡자매

1편 먼저 보기 : https://brunch.co.kr/@vorrrrry-kong/320


고민의 종류는 시간이 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은 낯설음이었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는 누군가의 집에 들어갈 일이 없는 아파트 문화, 서로의 경계를 착실히 지키며 관계를 맺는 회사생활에 익숙하게 살아왔다. 이제 막 서로를 알기 시작한 이웃들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낯설고,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미리 약속도 되지 않은 채로 저녁을 얻어먹겠다고 앉아 있어도 되는 건가'부터 '주방에서 가서 같이 일을 도울까, 주방 살림에 손대는 게 더 실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분주하게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판단이 서지 않아 어정쩡하게 서있기 일쑤였다.

두 번째는, 부채감이었다.

모임이 잦아지다 보니 한 집에서 여러 차례 손님을 맞기도 했는데, 그동안 우리 집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둘째가 태어난 후 집은 늘 엉망이었다. 이유식을 만들고 먹이며 어질러놓은 부엌과 바닥, 욕실에서 아기를 씻기고 치우지 못한 똥기저귀와 벗겨둔 옷, 두 마리 개들이 뿜어내는 털들, 첫째가 함께 어질러 놓은 수많은 책과 장난감, 책가방, 벗어놓은 옷과 과자 껍데기들..

오전 내내 청소를 해도 오후가 되면 밑 빠진 독처럼 놀랍도록 빠르게 지저분해졌다. 손님맞이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우리 부부 중 한 사람은 둘째를 돌봐야 하니 남은 한 명이 청소와 음식을 하면서 손님맞이를 해야 할 참이었다. 최소한의 집정리라도 하려면 하루전날부터는 해야 할 텐데, 매번 번개로 잡히는 모임이기에 "오늘은 저희 집에서 모이시죠." 하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 여보, 오늘도 너무 재밌었다. 근데 우리 집에도 한번 초대해야 할 것 같지 않아? 근데 매일 청소를 해두고 준비해 둘 수도 없고.. 어쩌지?

- 그러게. 그렇다고 날을 미리 잡아두면 너무 많은 인원이 오게 될까 봐 그것도 걱정이고.. 여덟 집이 다 오면 스무 명이 넘어. 반만 와도 열명은 넘네..

- 그러게. 다른 집들은 어떻게 늘 깨끗하지? 음식도 엄청 빠르게 만들어 오고. 대단하다.

- 응. 그래도 손님 가고 나면 뒤처리도 엄청날 텐데.. 다들 다른 집엔 몇 번씩 갔는데 우리는 한 번도 초대를 못하니 너무 미안하네. 휴


모임에 갔다 오는 날이면 남편과 결론 없이 빙빙 도는 대화를 몇 번이고 나눴다. 물론 먼저 눈치를 주거나 우리 상황을 이해 못 할 이웃들이 아니지만 그냥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 보니 마음의 부채감이 쌓였다. 나 역시 그동안의 얻어먹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대접하는 기쁨을 누리고도 싶었고, 다른 친구 집에 다녀올 때마다 우리 집에서도 모이면 안 되냐고 묻는 첫째의 소원풀이도 해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는 첫째에 대한 고민이었다.

첫째는 유치원 때부터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길어지면 에너지가 고갈되는지 잠시 혼자 쉬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표현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위층에서 많은 아이들 틈에 놀고 있는 첫째가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처음에는 졸리다며 9시면 집에 갔었는데 친구들과 늦게까지 노는 것에 재미가 들렸는지 취침시간이 점점 늦어져 나중에는 12시, 1시까지 노는 날도 많아졌다.

한창 모임이 유독 많았던 시기, 자기 전 함께 누우면 아이가 피로하다는 표현을 종종 하기 시작했다.


- 엄마, 나 오늘 속상했어.

- 왜? 무슨 일 있었어?

- 응. 다른 친구들 하고 싶은 놀이를 다 같이 해줬는데, 내가 하자는 놀이는 하나도 못했어. 맨날 하기 싫은 놀이만 하고 와서 속상해.


손으로 눈가를 닦으며 울먹인다.


- 하임이도 하고 싶은 놀이 있다고 친구들한테 이야기해 보면 어때?

- 했어. 여러 번 말했는데도 안 들어줘. 자기들 하고 싶은 놀이도 다 못했다고 소리만 치고. 내 얘기는 안 들어줘. 그리고 오늘 OO랑 OO가 계속 싸워서 나는 다른 데 가있었어.


함께 노는 아이들 수가 많다 보니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항상 큰 목소리와 적극적으로 의견 표출을 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대부분 목소리 큰 친구들 의견에 따르게 되고 의사표현을 하더라도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거의 없고 그러다 보니 원하지 않는 놀이에 긴 시간 참여하게 된다고 했다. 아이들이 피곤하고 졸린 컨디션으로 놀다 보니 각성, 흥분 상태에서 싸우거나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첫째는 본인이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지 않아도 불편하고 압박감을 느껴 자리를 피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첫째가 어떻게 자기표현을 해야 하는지,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자기 전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가끔 울기도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고민이 깊어졌다. 1학년이 되니 깊이 있게 감정을 느끼고 복합적으로 사고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기도, 그저 아이가 느끼는 투정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어른도 사회생활이 길어지면 지치기 마련인데 아이도 긴 시간 놀다 보면 피로도가 높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 함께 모여 또래들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놀이를 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여유 시간만 생기면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남편과 길고 긴 대화를 통해 대략의 바운더리를 정했다.


첫째,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을 계속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어른들까지 못해도 아이들이라도 자주 초대해서 식사를 챙겨주자. 다른 집에 갈 때에는 웬만하면 음식을 만들거나 사서 꼭 들고 가자.


둘째, 번개로는 초대할 수 없으니 곧 다가올 첫째의 생일, 둘째의 돌에 제대로 준비해서 대접하자. 그리고 가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경우엔 집 상태를 봐서 초대하고, 11시 전에 모임을 끝내기.


셋째로는 참여를 하되 아이를 일찍 재울 수 있게, 그리고 둘째 육아로 체력이 부족한 우리 부부의 에너지도 고려해 참여하는 시간 및 빈도를 조절하자.



그리고 몇몇 고민은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며 해결되었다. 알고 보면 아이 친구들에 대한 고민은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달에는 한창 싸웠던 아이들이 사이가 좋아지기도 하고, A와 친했다가 B와 친했다가, 다 같이 노는 게 좋았다가 둘이 노는 게 좋았다 하며 날씨처럼 바뀌었다.

날씨처럼 자연스럽게 자라고 변해가는 아이들

다 함께 갈등상황을 해결해 나가거나 다른 친구들이 의견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옆에서 보며 서로 배웠다. 첫째도 자신이 속상하거나 말 못 한 상황이 있다면 우리에게 털어놓고 다음번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화를 나누었다. 하도 자주 만나고 긴 시간을 보내니 금방 아이들은 막역한 사이가 되고, 아이도 곧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다. 몇 번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니 자연스럽게 자기표현의 범위가 넓어졌고, 우리 부부가 놀랄 정도로 몇 달 만에 당찬 면모도 조금 갖추었다.

동네 아이들은 다투고, 이르고, 울고 화내고,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면서 서툴고 느리지만 조금씩 자신들만의 관계를 정리해 갔다.


그리고 모임 횟수 역시 자연스럽게 줄었다. 마치 회사에 입사했을 때 일주일에 몇 번씩이고 만나고 했던 입사모임이 지금은 각자의 삶에 바빠 누가 결혼을 해야 겨우 모일까 말까 하듯이, 어른들도 각자의 삶에 바쁘게 적응하면서 모임의 횟수도 조금씩 줄었다.

어른들은 일을 하거나 배우고 싶은 수업을 등록하고, 아이들도 피아노며 수영, 축구, 숲체험 등 수업을 시작하니 부모들도 덩달아 아이들의 스케줄에 메여 바빠졌다. 또 각 집마다 제주에 놀러 오는 가족과 지인들이 많이 생기고,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하다 보면 다 함께 모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언제 또 모이려나' 하고 기다려지는 정도가 되었달까.


그리고 어느덧 우리가 벼르던 둘째의 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의 감사를 어떻게 대접하면 좋을지 행복한 고민이 시작됐다.

날씨가 좋을 시기라 돌잔치는 마당에서 진행을 하기로 하고 동네분들께는 카톡 단체방으로 날짜를 공유했다. 날짜는 빠르게도 지나갔다.

과연 우리는 돌잔치를 무사히 치렀을까?!


돌잔치 후기는 다음 편을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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