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보다 아름다운 일상이여

헬가 슈텐첼, 빨랫줄에 걸린 초현실주의

by 베리누나
creste.jpg Great Crested Grebe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일상의 풍경을 채운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러시아 태생의 시각 예술가 헬가 슈텐첼(Helga Stentzel)의 손길을 거치면, 이러한 평범한 장면은 유쾌한 상상력의 무대로 변모한다. 그녀는 빨래를 이용해 새, 말, 소 등 동물은 물론 다양한 형상을 창조하며, 이를 통해 '가정의 초현실주의(household surrealism)'라는 독특한 예술 세계를 펼쳐 보인다.


헬가는 어린 시절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제한된 환경 속에서 창의력을 키웠다. 바닥의 나뭇결이나 카펫의 무늬에서 다양한 형상을 찾아내며 상상력을 발휘했던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그녀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를 거쳐 광고계에서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브랜드 메시지가 아닌 ‘일상의 속삭임’을 전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다시 본연의 감수성으로 돌아온 헬가는 주방에서, 세탁기 옆에서, 그리고 빨랫줄 아래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해나가기 시작했다.


Draping_dragon_copy.jpg Draping Dragon
Screenshot2022-11-.jpg Andy Wallhole
Pegasus.jpg Pegasus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Pegasus>는 검은 티셔츠와 속옷, 수건 등 일상의 텍스타일을 조합해 만든 날개 달린 말이다. 무게감 없는 재료로 상상의 중량을 완성하는 솜씨는, 단지 시각적 유희를 넘어서 보는 이의 감정선을 환기시킨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순수한 상상력’이, 이 순간 빨랫줄 끝에서 다시 펼쳐지는 것이다.


무심히 지나치던 삶의 사물들이 그녀의 손길 아래 유머를 입고 살아난다. 때로는 수건이 눈을 깜빡이고, 양말이 속삭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녀의 세련된 위트에 흰 웃음을 짓다가도 불연듯 묘한 울림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어?”라는 질문은, 곧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는가”라는 성찰로 돌아오는 것이다.


헬가는 관람자에게 시종일관 한 가지 메시지를 건넨다.
“가장 소소한 것에서, 가장 크고 반짝이는 즐거움이 시작될 수 있어요.”


그녀의 작업은 그래서 단지 창의적인 재치 이상의 힘을 지닌다. 그것은 관람자를 내면의 어린아이와 다시 만나게 하고, 일상의 결을 천천히 쓰다듬게 만드는 감각의 기폭 장치다. 옷가지, 과일, 식기류 같은 익숙한 사물들이 그녀의 프레임 안에서 꿈을 꾸기 시작하면, 우리 또한 그 꿈에 초대받는다.


마법은 마법처럼 보이지 않을 때 가장 빛난다. 헬가 슈텐첼의 작품은 바로 그 진실을 고요하게 입증한다. 우리는 웃고, 멈춰 서고,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깨닫는다—사소한 것들로부터 인생의 놀라운 장면들이 태어난다는 것을.






*이밖에도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작품들을 감상하려면 그녀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보시길

https://www.helgastentz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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