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리틴, 존재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산 위에 거대한 분홍 토끼가 누워 있다.
누군가의 꿈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한, 혹은 우연히 앤트맨의 전투 현장에 있다가 사건에 휩쓸려 잘못 커져버린 듯한 모양새로 평범한 자연 속에서 기이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하제(Hase)》는 2005년, 오스트리아의 예술가 그룹 '겔리틴(Gelitin)'이 만든 설치 작품이다.
이탈리아 알프스의 아르테시나(Artesina) 마을 위쪽, 콜레토 파바(Colletto Fava)라는 언덕에 길이 60미터, 높이 6미터에 달하는 이 분홍색 토끼 한 마리가 '설치'되었다.
겔리틴은 이 작품을 단순히 감상하는 것이 아닌 체험하는 작품으로 기획했다.
이곳을 지나는 누구나가 토끼 귀에 기대어 낮잠을 자거나 배 위에 올라가 도시락을 먹었다. 다리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 분홍 토끼는 하나의 조형물이자 놀이터였고, 풍경이자 경험이었다.
겔리틴은 1990년대 초반부터 활동해 온 4인조 아티스트 그룹이다. 볼프강 간츠레이터(Wolfgang Gantner), 알리 얀카(Ali Janka), 토비아스 어반(Tobias Urban), 플로리안 라이더(Florian Reither)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키치와 유머, 육체성과 부조리를 활용해 예술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다른 작품들을 보니 꽤 전위적이다.) 진지한 철학보다는 장난스럽고 당혹스러운 장면을 만들어, 관람자의 감정을 교란하고 자유롭게 만든다. 《하제》는 그런 겔리틴의 정체성이 집약된 작품이다.
특히 이 설치물은 시간 속에서 무너지고 풍화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겉은 방수 섬유, 속은 짚과 철사로 채워져 있어 바람과 비, 햇빛을 맞으며 천천히 분해되도록 계획했다. 2025년쯤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2016년경 대부분의 형태가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바로 이 ‘소멸’의 과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자연 풍화와 동물들에 의해 조금씩 해체되어 가는 모습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라 의도된 퍼포먼스였다. 겔리틴은 이 조형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사라지길 바랐다"말했다. 영속성 없이도, 예술은 감정적이고 철학적인 영향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토끼를 처음 봤을 때 마치 생명력을 빼앗긴 생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풀어 오른 몸, 바람에 뜯긴 털, 삐뚤어진 두 눈, 내장을 늘어뜨린 채 풀밭 위에 널브러진 모습이 누군가의 의도로 스러진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조형물이란 본래 창작자의 손을 거쳐 생명을 갖는 물체다. 그러니 생명력을 얻은 후 본래의 무생물로 되돌아가고 있는 토끼의 운명이란 얼마나 부조리한가... 하는 생각들.
말없이 '쓰러져 있는' 분홍 토끼의 모습은 다양한 감정을 낳으며 오랜 여운을 남긴다.
누군가에 의해 생명력을 얻었으나 생명력을 빼앗긴 듯한 모습,
귀여워야 할 것이 내뿜는 기이함과 불쾌함,
웃음 짓게 만들어야 할 대상을 침묵하게 만드는 역설,
색이 바래고 형태가 무너져가는 것들이 남기는 특유의 무상함까지,
말을 잃은 토끼가 건네는 메시지가 자기 몸만큼이나 거대하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이의 마음속 풍경 어딘가엔 아직도 그 토끼가 누워 있을지 모르겠다.
예술은 어떤 감정도 강요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https://www.gelitin.net/projects/h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