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반갑지만, 졸업은 반갑지 않은 나를 위해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기가 언제부턴가 가벼워졌다. 10월 중반까지 폭염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틀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파아란 빛으로 맑아진 하늘과 선선한 바람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를 다시 본 것처럼 반갑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슬랙스와 셔츠들을 꺼내입을 수 있게 된 건 덤으로 기쁘다. 내가 사계절 중 가을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다.
시간의 흐름은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도 보인다. 언젠가부터 피드에는 긴 옷을 걸친 사람들이 많아졌고, '가을에 가기 좋은 장소 추천!' 같은 컨텐츠들도 만날 수 있다. 몇 주 전부터 졸업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하늘높이 던지며 환하게 웃는 친구들의 모습도 자주 보이는 사진들 중 하나다. 어느덧 마지막 학기를 앞둔 S급 고인물이 되니,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쓸어넘긴 이런 사진들도 다시 보게 된다. 나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벌써 졸업, 그것도 학생 인생의 졸업이라니. 시간은 원망스럽게 빠르다. 아마 졸업을 앞둔 친구들은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내 인스타그램 피드에 내가 학사모를 던지거나, 졸업을 기념하며 함께 찍은 사진은 (아마도)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학생 경력 16년의 베테랑으로 살았지만, 난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추억이나 애착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생일 축하 파티를 한 적도, 기억에 오래 남을 재미있는 수학여행을 간 적도 없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상담하던 몇몇 선생님들, 날 안쓰럽게 생각해서 챙겨주던 적은 수의 ‘친구’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정도가 내 학창시절의 기억이다.
학교 그 특유의 규칙들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단순히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들을 넘어, 친구들 사이의 암묵적인 법칙들을 난 잘 이해하지 못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드라마, 친구들 사이에서 얘기하는 따돌림을 당하기 딱 좋은 행동거지나 말투, 그런 것들을. 그러다 보니 나는 친구들을,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 했다. 나에게 학교는 어떻게든 빨리 탈출해야 할 곳이 되어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고 졸업식 때 해방감을 느끼거나 했던 건 또 아니었다. 어차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야 했으니까. 대한민국의 학교는 나에게는 참 여러 의미로 어려운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추석 연휴, 공휴일 등이 많아서 학교를 쉬는 날이 상대적으로 많은 계절이 가을 아니던가. 난 그럴 때마다 학교라는 공간에 있어도 되지 않는다는 행복감을,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바람을 통해 느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이 가을도 끝날 것이며 (그것도 아주 금방), 춥고 고통스러운 겨울이 올 것이라는 것 또한 느껴졌다. 결국 나는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학생이었으니까.
가을 저녁의 노을은 학생 시절 나의 두 눈에 서로 다른 두 풍경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는 평화롭고 차분한 마무리를 다른 한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듯한 두려움을.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어도, 대학교는 내가 초중고등학교 때 기대했던 자유와 깨달음, 행복을 주지는 못 했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학교라는 공간이 더 이상 나를 물리적으로 가둘 수 없게 된 것이다. 대학교에 와서 내가 제일 열심히 한 게 대외활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학교에 와서도 이전과 똑같이 답답하고, 재미없고, 혼자였으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서 내가 밖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연료가 되어 준 것 아닐까 싶다. 제대로 된 학창시절이 없는 데서 느낀 답답함과 짜증이 나를 세상 밖으로 활발하게 나아가게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 같아 아이러니하다.
처음으로 참여한 대외활동에서는 전혀 새로운, 나를 환영해주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로 참여한 활동에서는 나도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를 일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활동에서는 내가 어디까지 발전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원했던 세상은
전부 학교 밖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학생 경력의 종지부를 찍는 대학교 졸업식은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가운 졸업식이 될 것 같다. 졸업식에 갈 생각도 없고, 졸업사진을 찍을 생각도 없다. 대신, 나의 학생 시절 동안 쌓인 자기혐오와 불안, 증오라는 먼지들을 가을바람에 날려보낼 생각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올해 가을바람은 불안하지 않다. 더 이상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기분좋은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