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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yager Sep 02. 2018

누구나 (자신만의)
가을과 졸업을 맞이한다

가을은 반갑지만, 졸업은 반갑지 않은 나를 위해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기가 언제부턴가 가벼워졌다. 10월 중반까지 폭염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틀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파아란 빛으로 맑아진 하늘과 선선한 바람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를 다시 본 것처럼 반갑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슬랙스와 셔츠들을 꺼내입을 수 있게 된 건 덤으로 기쁘다. 내가 사계절 중 가을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다.


시간의 흐름은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도 보인다. 언젠가부터 피드에는 긴 옷을 걸친 사람들이 많아졌고, '가을에 가기 좋은 장소 추천!' 같은 컨텐츠들도 만날 수 있다. 몇 주 전부터 졸업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하늘높이 던지며 환하게 웃는 친구들의 모습도 자주 보이는 사진들 중 하나다. 어느덧 마지막 학기를 앞둔 S급 고인물이 되니,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쓸어넘긴 이런 사진들도 다시 보게 된다. 나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늦여름 ~ 초가을이 되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졸업식 사진. 환한 미소와 하늘 높이 날아가는 학사모가 필수요소다.


벌써 졸업, 그것도 학생 인생의 졸업이라니. 시간은 원망스럽게 빠르다. 아마 졸업을 앞둔 친구들은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내 인스타그램 피드에 내가 학사모를 던지거나, 졸업을 기념하며 함께 찍은 사진은 (아마도)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학생 경력 16년의 베테랑으로 살았지만, 난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 추억이나 애착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생일 축하 파티를 한 적도, 기억에 오래 남을 재미있는 수학여행을 간 적도 없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상담하던 몇몇 선생님들, 날 안쓰럽게 생각해서 챙겨주던 적은 수의 ‘친구’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정도가 내 학창시절의 기억이다.


학교 그 특유의 규칙들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단순히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들을 넘어, 친구들 사이의 암묵적인 법칙들을 난 잘 이해하지 못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드라마, 친구들 사이에서 얘기하는 따돌림을 당하기 딱 좋은 행동거지나 말투, 그런 것들을. 그러다 보니 나는 친구들을,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 했다. 나에게 학교는 어떻게든 빨리 탈출해야 할 곳이 되어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고 졸업식 때 해방감을 느끼거나 했던 건 또 아니었다. 어차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야 했으니까. 대한민국의 학교는 나에게는 참 여러 의미로 어려운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추석 연휴, 공휴일 등이 많아서 학교를 쉬는 날이 상대적으로 많은 계절이 가을 아니던가. 난 그럴 때마다 학교라는 공간에 있어도 되지 않는다는 행복감을,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바람을 통해 느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이 가을도 끝날 것이며 (그것도 아주 금방), 춥고 고통스러운 겨울이 올 것이라는 것 또한 느껴졌다. 결국 나는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학생이었으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맑은 가을날의 하늘. 나에게는 행복과 불안을 함께 가져다 준 이중적인 존재다.



가을 저녁의 노을은 학생 시절 나의 두 눈에 서로 다른 두 풍경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는 평화롭고 차분한 마무리를 다른 한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듯한 두려움을.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어도, 대학교는 내가 초중고등학교 때 기대했던 자유와 깨달음, 행복을 주지는 못 했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학교라는 공간이 더 이상 나를 물리적으로 가둘 수 없게 된 것이다. 대학교에 와서 내가 제일 열심히 한 게 대외활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학교에 와서도 이전과 똑같이 답답하고, 재미없고, 혼자였으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서 내가 밖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연료가 되어 준 것 아닐까 싶다. 제대로 된 학창시절이 없는 데서 느낀 답답함과 짜증이 나를 세상 밖으로 활발하게 나아가게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 같아 아이러니하다.


처음으로 참여한 대외활동에서는 전혀 새로운, 나를 환영해주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로 참여한 활동에서는 나도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를 일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활동에서는 내가 어디까지 발전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원했던 세상은
전부 학교 밖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학생 경력의 종지부를 찍는 대학교 졸업식은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가운 졸업식이 될 것 같다. 졸업식에 갈 생각도 없고, 졸업사진을 찍을 생각도 없다. 대신, 나의 학생 시절 동안 쌓인 자기혐오와 불안, 증오라는 먼지들을 가을바람에 날려보낼 생각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올해 가을바람은 불안하지 않다. 더 이상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기분좋은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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