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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yager Dec 02. 2018

주인공은 내가 할게,
엑스트라는 누가 할래?

세상은 놀랍도록 우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거 생각보다 편해요

‘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고, 배려심이 깊고, 필요할 때 선뜻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을 보고 우린 보통 착하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학창시절을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이 단어는 상당히 다른 뜻의 옷을 입게 되는 경우가 많다. 걔 어때?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걔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거나, 아는 게 없거나, 딱히 장점이란 게 없을 때 우리는 걔 착해, 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지 알지? 하는 눈빛과 함께


"K 착하지~" 부모님이나, K와 친하다고 하는 친구들이나 항상 하던 말이다. K가 배려심이 많고 사려깊거나 한 건 모르겠다. K에게는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둘 중 하나였고, 말을 먼저 걸거나 활발하게 운동을 하거나 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K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데 꽤 애먹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처럼 K를 설명해 주는 단어가 '착하다'였을 것이고.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K는 사실 별 생각은 없었다. 착하게 나쁜 건 아니잖아.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본격적으로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든 건, 대학교 들어와서였다. K 착하지 뒤에 물결표가 아닌, 말줄임표 세 개 짜리가 붙기 시작했던 걸 알게 된 것이다. 딱히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부족한 눈치로도 알 건 알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든, 동아리에서든, 수업 시간에든. K는 그냥 성격 순하고 착한 사람, 그 이상의 색깔은 없어보였다. 이성으로서의 매력도, 기억할만한 구석도 없었다. 아, 몇몇 사람들에게는 조별과제 할 때 얻어갈게 있으니까 그건 좋았겠네. K는 그래도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결국 K는 어떤 무대에 서든 항상 엑스트라 1이었던 셈이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갈 때 겨우 이름이 보이는 엑스트라 1.

더 이상 그의 존재가 물결표로 존재를 표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줄임표로 축약해도 무방한 존재가 된 순간은 K에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K는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필요해 보여서 도와줬고, 힘들 때 위로해줬잖아. 그렇게 사는 게 옳은 가 아닌...가? 나 진짜 호구짓한 건가? 


문득 카카오톡을 열어봤다. 이거 좀 도와줄 수 있겠냐, 기말고사 범위 어디부터 어디까지냐, 말들 말고는 메시지 창에 뭐가 없었다. 페이스북 메시지창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래서 나쁜 남자 나쁜 여자가 인기가 많은 건가, 하고 K는 생각했다. 군대를 갔다오면 달라지겠지. 그래, 군대를 다녀오면 달라질거야.




근데 어떡하냐 K야, 하나도 안 바꼈는데. 그나마 있던 한 줌의 친구들도, 알바 뛰고 등록금과 공과금에 사라진 월급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고맙다고 밥 한 번 사주겠다, 커피 사주겠다던 선후배와 동기님들께서는 다들 공사가 다망하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나쁘고 간지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소위 말하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말했지 K, 너 너무 퍼준다니까." 군대를 4개월 먼저 일찍 갔다온 L은 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무랐다. "야,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난 이해를 못 하겠어." 열받은 K의 반격. 

그러나 L은 가벼운 사이드스텝으로 피하고 잽을 연이어 날린다. 

"난 항상 말했잖아. 세상이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하긴, 틀린 말도 아니지." 잽을 방어하는 데 실패한 K에게, L은 마무리 어퍼컷을 날린다. 



누구도 너한테 그렇게 살라고 한 적 없어. 너가 선택한 거야. 알지?



"이 세상은 놀랍도록 너에게 관심이 없어.
막말로 너 하나 죽어도 세상에 뭐가 크게 변한다거나 하진 않아." L은 말했다. 

"야, 그건 나도 알아. 그걸 굳이 꼭 그렇게 찝어 얘기해야겠냐."

 K는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기름을 붓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러나 L의 그 다음 말은 K를 벙찌게 만들었다.



근데 말야, 다른 말로 하면 그러니까 너나 나나 자유로운 거 아닌 가 싶어.
모두가 널 주목하면 처음엔 좋겠지만, 나중엔 너가 뭘 해도 지겨워하겠지.
근데 관심이 없다가 새로운 걸 보면, 오 쟤 뭐야? 싶은 거지.



"근데 그거 엄청 기가 막힌 자기합리화 같은데?" K는 피식하며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L도 씩 웃으면서 빈 소주잔을 채웠다.

"그러면 뭐, 요즘 말대로 하면 마이웨이로 살라 뭐 그거야?" 

"음... 기대를 하지 말라는 말이 더 맞겠네. 

너가 먼저 나서서 도와주고 잘 해 준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널 기억해 주거나, 

잘 해줄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 그 정도겠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라면, 이 대화 이후로 깨달음을 얻은 K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갈 것이다. 적당히 빠른 박자에, 밝고 화려한 색감으로 K 주변에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는 그런 장면이. 

그러나 K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대화 이후로도 K는 여전히 친구도, 말수도 적었다. 여전히 지인들 사이에서 K는 착한 사람이었다. 


K에게는 아주 작은, 딱 하나의 변화가 찾아왔다. 착하다는 말에 대해 신경을 안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L이 알려준 말을 기억하고, 어차피 내가 뭘 해봐도 큰 문제 없겠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해 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해 보고 싶다 생각만 하던 랩 가사를 써 보고, 사운드클라우드에 녹음해서 올려보기도 했다. 친구들이 안 어울린다고 하던 옷도 걸쳐보고, 항상 궁금하던 복싱 동아리에도 들어가봤다. 체력이 너무 부족해서 한 학기도 못 채우고 나왔지만. 어쨌든 K는 다른 사람들의 과제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 보는 시간을 늘렸다. 그리고 첫 눈이 오고 바람이 차가워지던 어느 날, K는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


X나 홀가분하네.




그래서, 지금 K는 어떻게 사냐고? K는 착한 사람이다. 변한 게 있다면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닌, K 감독 K 주연인 소규모 독립영화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힙합에 관심이 많았던 K는 함께 뜻이 맞는 친구들과 자그마한 크루를 만들어, 주말마다 공연을 한다. 평일에는 장학금을 위해 밤을 새며 공부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와중에도 버스에서 아이폰 메모장에 가사를 적는다. 영상을 잘 찍는 친구와도 최근 친해져서 예술 프로젝트를 할 생각도 하고 있다. K는 여전히 착한 사람이다. 단지 거기에 신경을 안 쓰고 자기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이 된 게 차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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