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에서 맞은 봄
알래스카, 내가 사는 시골섬은 5월이 되어서야 봄이 오는 것 같다.
오늘은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의 학교에서 필드 트립을 가는 날이다.
목적지는 워드 레이크라는 호수.
며칠 째 비가 쏟아졌는데 오늘도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비가 온다고 해서 행사를 취소하지 않는다. 그렇게 취소해 버리면 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다.
학교에서 주는 점심이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기에 한국음식을 고집하는 아들을 위해 아침부터 소시지 김밥을 쌌다.
워드 레이크.
그 이름을 들으면 언제나 2017년 알래스카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오른다.
잔잔한 호수 위로 비친 산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고 달력 속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쉬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지금까지 내 생애에서 본 가장 멋진 풍경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항상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다행히 아이들이 필드트립을 가는 시간에 비가 그쳤다.
함께 호수 근처를 산책하며 보니 노란색 스컹크 캐비지가 여기저기에 보였다.
스컹크 캐비지는 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먹는, 허기진 배를 달래는 식물 중 하나이다.
이 꽃이 피었다는 것은, 봄을 왔다는 신호다.
'언제 봄이 오려나, 혹독한 이 겨울은 언제 끝이 나려나'
그렇게 기다렸던 그 겨울 끝이 지금 내 눈앞에 와 있었다.
아무리 길고 어두운 알래스카의 겨울도 결국 봄 앞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Season”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봄은 마치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계절이다.
알래스카의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남쪽 다른 지역처럼 갑작스럽게 꽃이 터지거나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다. 이곳의 봄은 마치 겨울과 투쟁하듯, 한 뼘씩 하루씩, 조심스럽게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 모습은 마치, 내 삶의 시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성경에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1~8)
삶에도 계절이 있다.
봄에는 새순이 돋고, 여름에는 풍성히 자라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엔 쉬고 뿌리를 내린다.
어떤 계절에도 헛된 시간은 없다.
지금이 겨울 같을지라도 희망이 있는 이유는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오기 때문이다.
봄을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모든 게 새롭고 기대에 차 있을 것이다. 여름에 서 있는 사람은 일하고, 책임지고, 버티는 삶을. 가을에 있는 사람은 성찰과 수확의 시즌을 보낼 것이고, 겨울에서 조용히 멈춰 있는 듯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사계절>에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인 폴 투르니에는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눈다. 어린 시절을 봄, 성숙한 삶은 여름, 노년은 가을, 죽음과 그 너머는 겨울이다.
그는 인생의 모든 단계가 선물이기에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말고, 현재의 계절을 충실히 살아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성숙한 삶이다.
또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의 저자 캐서린 메이는 겨울 같은 시기를 '윈터링'이라 부른다.
그녀는 인생에서 맞이하는 '겨울'같은 시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겨울을 단순히 견뎌야 할 시기가 아닌, 내면의 성찰과 재충전의 시간으로 바라본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어쩌면 사계절 중에 가장 힘든 시기가 겨울이 아닐까. 어둡고 추운 시간.
갑작스러운 병이나 관계의 단절, 진로의 좌절과 마음의 붕괴.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공허한 시간.
우리는 그런 순간들을 '멈춘 시간', '낭비되는 시간'이라 부르지만 실은 윈터링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이 되면 나무는 잎을 떨구고, 곰은 동면에 들어간다. 대지 전체가 조용히 호흡을 멈추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재생을 위한 침묵이다.
겨울은 생명이 다시 피어나기 위한 고요한 준비의 계절이다. 나도 인생의 겨울과 같은 외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무기력하고, 고립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윈터링은 회피가 아니라, 정직한 쉼이다.
인생에 겨울이 왔을 때 억지로 여름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겨울을 받아들이는 것.
차가운 침묵 속에 자신을 품고 기다리는 것.
나는 그 과정을 이곳 알래스카의 기나긴 겨울을 보내며 배워가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봄을 더 기다리고 좋아하게 되었는지도모르겠다.
겨울은 영원하지 않다. 시즌이 가고 오는 것처럼 그 누구도 겨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겨울을 지나지 않고서는 봄을 맞을 수 없다.
윈터링은 그렇게 삶이 우리에게 강제로 안겨준 하강의 시간이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보이지 않는 성장의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 더 진짜 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알래스카에서 몇 번의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은 마치 겨울 속에서 꽃이 준비되는 축복받은 침묵의 계절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즌을 부러워할 필요도, 따라가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즌을 잘 알고 그 시즌에 맞게 살아간다면, 선물과도 같이 주어진 매일의 삶에서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며, 내게 주신 그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축복된 삶이 될 것이다.
알래스카에 봄이 왔다.
노랑 스컹크 캐비지를 보며 짧지만 귀한 이 계절을 누려본다.
곧 여름이 오고 다시 기나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봄이라는 시즌에 예비된 축복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