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블로그에 바나나 이야기를 올렸다.
제목은 <내가 아는 맛 6가지의 버내너스>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살았던 그녀는 그곳에서 맛보았던 바나나 여섯 가지를 소개하며, 기억을 더듬어 바나나 그림도 직접 그렸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바나나에 얽힌 추억과 인도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바나나를 좋아했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갈 때마다 사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요즘 바나나는 먼 데서 오는 거라 약품 처리를 많이 해서 몸에 안 좋아."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비싸서'였다.
나는 억지로 사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다. 다만 내 마음속에 바나나는 '항상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 없던 과일'로 남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처음 스리랑카를 갔다.
그곳 시장엔 바나나가 정말 많았다. 가격도 매우 저렴했다. 가게 바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바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나는 그중에서도 크고 통통한 노란 바나나를 즐겨 사 먹었다. 그건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아주 소박한 기쁨이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즐겨 먹던 바나나는 사람을 위한 식용 바나나가 아니라, 동물의 사료로 주는 바나나였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선 기분이 약간 이상했지만 그래도 맛있게 즐겨 먹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기로 했다.
대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남부 인도를 여행했었다.
그곳 시장에도 정말 다양한 바나나들이 넘쳐났다. 무엇보다 가격이 너무나 저렴했다.
그때 우리를 인솔하던 분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했다. 바나나를 참 좋아해서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비싸다는 이유로 사주지 않았다고.
그랬더니 다음 날, 그분이 시장에서 바나나를 뿌리째 한 다발 사 오셨다. 그리고 내 방에 놓아주며 실컷 먹으라고 하셨다.
웬 횡재인가? 나만 특별대우받는 것 같았지만, 룸메이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측은하게 보였나 보다. 사실 그 바나나 다발이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온전히 내 것, 내 소유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겐 너무나 큰 만족과 기쁨이 되었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알래스카에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섬은 식재료와 과일을 일주일에 한 번, 바지선을 통해 들여온다. 그래서 신선도는 기대하기 어렵다. 상태가 좋지 않은 채로 도착할 때도 많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다른 대안이 없기에, 그저 바지선이 제때 들어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도 사과도 잘 먹지 않았다. 사실 과일이든 뭐든 무척이나 비싼 곳이다 보니 "안 먹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몸에 좋으니 먹으라고 권해도 별 반응이 없던 첫째가 어느 날부터인가 바나나를 먹기 시작했다.
나 혼자 먹을 때는 꼬박꼬박 사지는 않았는데 딸이 좋아하니 그 후로는 마트에 갈 때마다 바나나를 꼭 사게 된다. 올가닉 바나나와 일반 바나나, 두 종류가 있지만 나는 늘 조금 더 저렴한 일반 바나나를 고른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먹었던 바나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알래스카 시골섬에서 바나나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 친구의 바나나 그림을 보며 다시 20대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언제 다시 인도나 스리랑카에 갈 수 있을까? 만약 다시 가게 된다면 꼭 시장에 가서 바나나를 다발채로 사 먹고 싶다. 이걸 내 버킷 리스트에 넣어봐야 할까?
살짝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