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에 초집중하도록 근접샷으로 촬영되었다. 멀미가 날 정도로 사람을 쫓아다니는 카메라.
올리비에는 주유소에서 일하는 전 부인에게 찾아가 임신을 축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자신들의 아들을 죽인 아이가 풀려났다고.
“제 오른발부터 선생님 왼발까지 얼마죠?”
“4m 10cm”
재보니 거의 맞는다. 올리비에는 프란시스를 맡아 목공일을 가르친다. 길고 무거운 나무 판자를 들어 옮기는 방법을 알려준다. 뒤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사다리에 올라가기를 하다 결국 프란시스는 중심을 잃고 떨어진다.
“주말에 집에 안가니?”
“엄마 남자친구가 제가 오는 걸 싫어해요.”
“아빠는?”
“아빠는 어디 사는지 몰라요.”
올리비에의 전부인은 소리친다.
“당신 대체 누구편이야? 아무도 당신처럼은 안해, 왜 그래?”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올리비에.
영화 ‘클로즈’가 생각났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원인을 제공한 아들의 친구를 보며 죽은 아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하는 엄마. 올리비에도 프란시스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그러나 만나서 한참 동안 목공에 대해 가르쳐주기만 할 뿐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 증오와 원망과 미움이 응축되어 폭발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올리비에는 눈으로만 모든 것을 표현한다.
“11살에 왜 감옥을 갔어?”
“바보같은 짓, 도둑질을 했어요. 다른 것도 했죠.”
“선생님, 제 후견인이 돼 주세요.”
축구하며 다시 묻자 프란시스는 태연히 얘기한다.
“사람을 죽였어요.”
집요하게 묻는다.
“왜 죽였지? 네 후견인이 되려면 나도 알아야지.”
“너가 한 일 후회하니?”
“그럼요, 5년이나 썩었는데.”
“네가 죽인 꼬마가 내 아들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프란시스는 도망간다. 목재소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이 계속된다. 결국 밖으로 나가 숲으로 도망치고 끝까지 쫓아가 프란시스의 목을 조르는 올리비에. 감정은 소용돌이 치고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둘은 일어난다.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으로만 서로를 쫓으며 나무를 옮기고 일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이가 눈앞에 있다. 어떤 감정이 들까? 사랑하는 내 아이가 갑자기 타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참척을 겪은 부모의 심정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세월호의 육성기록을 담은 책을 보면 부모가 아이의 방에서 옷에 묻은 머리카락을 코팅해서 갖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이 나온다. 그들의 사고 직후부터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과 의식의 흐름이 가감없이 담겨있다. 읽지 않았으면 몰랐을 얘기들이 아프게 적혀있다. 부모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소리 없이 우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사망자의 동생, 동정어린 눈빛들을 견뎌야하고 추억이 담긴 집이 무서워 이사를 가는 가족들의 말 못할 괴로움을 책을 읽고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일까? 살인죄로 5년을 감방에서 썩은 아이는 살인을 뉘우치기 보다는 자신이 복역한 시간이 아깝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영화는 누구의 편도 아니고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영화는 판단하지 않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지도 않는다. ‘이런 일이 있어, 어떻게 할래?’ 질문을 던지니 고민이 된다. 아들을 죽인 아이에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올리비에처럼 알고도 모른 척 뭔가를 차분하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학교폭력으로 몸살을 앓는 학교의 현실. 한 대만 맞아도 고소하고 서로 오랜 시간 변호사를 대동해 싸우는 판국에 내 아이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면 그 부모는 가해자 아이를 눈 앞에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까? 가해자 아이가 5년을 감옥에서 죄값을 치렀다고 해서 내 아이가 살아오는 건 아니다.
그럼 평생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해 아파하며 내 마음도 파먹는 것이 맞을까? 물론 머리로는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사람에게는 머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있다. 머리로 통제가 잘 되지 않는 가슴이 있기에 힘든 것이다. 가해자 아이에게 나도 가해를 가하는 것이 맞을까?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여러 가지 경우 중 가장 강력한 상황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올리비에의 찌를듯한 눈빛, 조용히 침묵으로 분노하는 태도는 어찌하지 못하는 내면 세계를 표현해준다. 후회하는지, 왜 그랬는지 묻는 그의 마지막 포효는 그동안의 침묵을 보아왔기에 더 강렬했다.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그의 앞에는 그래도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삼킨 채 살아가야만 한다. 거대한 가시라도 삼킨 것처럼 속이 아프고 껄끄럽고 개운하지 않아도 내일이 있기에 또 살아야한다. 어떻게든 상처를 안고, 딛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 시간이 흘러도 마모되지 않는 상흔이 있다. 영화는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거대한 아픔을 흘려보내고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아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