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후의 사람들은 알만한 배우,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야가 30cm인 송승환. 수십번 귀로 들어 대사를 외우고 연극무대에 선다. 난타로 알려진 배우겸 연출가. 대한민국 사람들 거개 보았을 그 유명한 난타를 볼 기회가 없었다. 연기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데 그런 악조건 속에서 연기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소극장 S시어터는 안온하면서도 답답하지 않고 관람하기 좋았다. 일본작가 미타니 코키 작품인 ‘웃음의 대학’. 줄거리를 일부러 읽지 않고 찾아갔다. 얼마나 웃기길래 웃음의 대학이라고 했을까? 시대는 1940년 전시상황인 일본. 희극 극작가가 검열관을 찾아간다. 대본이 통과되어야 무대에 올릴 수 있다.
“어허, 이렇게 해서는 무대에 올릴 수 없습니다”
“왜요? 어느 부분이 문제입니까?”
“이런 시국에 ‘로미엣과 줄리엣’이라는 러브 스토리가 말이 됩니까?
제목이 서양작가가 쓴 작품이랑 같잖아요. 허가 내 줄 수 없습니다.”
연습할 시간이 줄어들어 통과시켜달라며 통사정을 해보지만 ‘그건 댁의 사정이죠’라고 차갑게 거절하는 검열관. 실망한 극작가는 다음 날 다시 찾아온다. 이번에는 제목을
‘햄릿과 줄리엣’으로 바꿔온다. 여기서부터 웃기기 시작한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설정이다. 그리고도 검열관은 계속 트집을 잡는다. 이번에는 키스신이 너무 많으니 모두 없애라고 말한다. 작가는 입술이 아닌 볼이나 이마에 하면 되지 않는냐고 사정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모든 키스신을 빼고 하는 시늉만 하겠다고 했는데 다시 통과 실패다. ‘천황폐하만세’를 극중 한번은 외쳐야 한단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검열관과 어떻게든 무대에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잃어버린 채 대본을 바꿔대는 극작가.
급기야 마지막에는 경찰청장이 출연을 원한다고 역할을 달란다. 키스를 하려는 햄릿과 줄리엣을 방해하는 역할을 억지로 끼워넣고 둘이 무대에서 연습을 한다. 어느샌가 검열관은 극작가와 일어서서 연기를 맞춰보기까지 한다. 대사가 머리에서 즉석으로 떠오르고 서로 어떤 대사가 더 어울리는지 고민하며 서로를 격려한다. 호흡을 맞추며 긴장이 느슨해지는가 싶지만 다시 얼어붙는 분위기. 희극인데 웃긴 장면을 모두 없애란다.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면 그런대로 또 고쳐오는 작가. 그렇게 고쳐온 대본을 보고 혼자 집에 가져가서 웃는 검열관.
웃을 권리를 왜 국가가 빼앗냐고 항변하는 작가. 불굴의 의지로 어떻게든 무대에 작품을 올리려는 작가. 그의 대사는 울림이 있다. 하룻 밤 사이에 고칠 수 있겠냐고 묻는 검열관 앞에서 작가는 오열하듯 외친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 해보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처음 살아보는 인생인데 무엇이든 부딫쳐보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레 겁 먹고 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고 무엇도 이뤄낼 수 없다.
결혼을 해보지 않고, 아이를 낳아보지 않고, 중년을 살아 보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건 무모하리만큼 긴장되는 첫 순간이 있다. 키스도 해보아야 아는 것이고 아기도 낳아보아야 아는 것이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보아야만 아는 것들이 있다. 바닷물에 들어가봐야 파도를 느낄 수 있고 산 정상에 올라가 보아야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는 물리적, 시간적 제약이 있다. 선택 앞에서 주춤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많은 선택들 앞에서 어느 길로 갈까? 무엇을 선택할까는 개인의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렇게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있는가? 무모하지만 꼭 해보고 싶은, 죽을 만큼 힘들어도 가고 싶은 길이 있는가? 무대에 작품을 올리고야 말겠다는, 열심히 매일 밤잠을 포기하고 대본에 매달리는 작가는 무엇을 위해 이리도 애를 쓰는가? 관객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본인의 작품이 무대에서 연기자들에 의해 구체화 되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목숨만큼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검열관이 어떠한 무리한 요구를 해도, 대본이 누더기가 되도록 고쳐져도 포기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다.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길, 힘들어도 가고 싶은 길. 작품을 보고 눈물이 났다. 열심히 살았는가? ‘해봐야 알지 어떻게 알겠냐’는 외침은 나에게도 와 닿았다. 살아보지 않고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어딘가에 가 닿겠지. 어쩌면 이렇게 대본을 고쳐가며 가는 과정, 삶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살아내는 과정이 삶이 아닐까? 무대에 올려질 수 있는지, 관객들이 웃을지 해 봐야 아는 것이다. 준비하는 그 날들이 즐겁고 의미 있는 것이다.
폭소를 터뜨릴 정도로 유머러스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며 웃게 만드는 작품이다. 관객이 없는 듯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두 배우를 보며 드는 생각. ‘얼마나 연습을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송승환은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몇 발자국 가면 의자, 몇 걸음 가면 옷걸이, 발자국수로 자리와 물체를 파악하며 연기를 했다. 그가 아니면 그의 심정과 어려움은 알지 못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감동을 주는 무대를 보고 나온 광화문은 유난히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무엇이든 기회가 오면 물러서지 말고 해보자. 어떻게든 수정하고 고치고 바꿔가며 최대한 무대에서 내려가지 말고 작품을 올리자.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으면 해보고, 노래할 기회가 있으면 불러보고. 여행도 무서워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멀리 멀리 가보자. 가보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대사보다 더 우리 인생에 바치는 격려는 없을 듯 싶다.
통과가 될 듯 말 듯 애를 태우게 하는 검열관 역할의 송승환은 자연스럽고 중후한 연기로 한시도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상대 배우 주민진 또한 자로 잰 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역할을 해낸다.
‘해봐야 알죠,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징집되는 작가에게 꼭 돌아와서 연극을 무대에 올려달라고 애원까지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트집을 잡으며 둘은 무대에서 장난삼아 쫓고 쫓기는 시늉을 하며 막을 내린다.
연기만 하기에는 심심하다며 ‘파주페어 북앤컬쳐’ 총감독을 맡았다는 송승환 배우. 시각장애 4급판정을 받은 그가 절망만 했다면 도전하지 못할 일이다. 배울 점이 많은 인생 선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