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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Sep 01. 2024

전주의 추억

전주의 고로케

광명역에서 손쉽게 갈 수 있는 전주는 멀지 않았다. 남쪽으로는 여행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감행을 못 했었는데 막내딸이 전주를 가보자 해서 용기를 내었다. 전통적인 장소에 대한 로망이 없어서인지 오래된 전통건물이나 의상 입고 사진 찍기등 에 관심이 없다. 추운 1월에 도착한 전주는 경기지역과 추위의 강도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남쪽 지역이지만 체감온도가 어떨지 모르니 큰딸에게 따뜻한 패딩을 꼭 챙기라고 했건만 말을 듣지 않는다. 예상이 들어 맞지 않으면 좋으련만 전주는 우리가 사는 지역보다 더 추우면 추웠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옆에 다니는 딸이 달달 떨며 계속 ‘추워,추워’를 반복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안쓰러움보다는 왜 내 말을 듣지 않아 저리 고생할까 하는 미움이 더 커 싫은 소리를 하게 된다. 가족 여행이 그렇듯이 허물이 없다 보니 쉽게 감정을 내보이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기 쉽다. 옷을 겹쳐 입는다 한들 패딩만 할까? 딸이 추워하니 미안해서 여기저기 더 다니고 싶다가도 마음을 접는다.  

     


딸은 딸대로 본인 때문에 여행을 망칠까 봐 힘들어도 내색도 잘 못하는 눈치다. 어찌어찌 한옥거리를 보는 둥 마는 둥했다. 나무나 풍성한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건물보다도 가로수나 꽃들에 관심이 있는데 겨울이다 보니 앙상한 가지와 부는 바람에 옷깃만 잔뜩 여미고 웅크리며 걸었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추천해준 비빔밥은 경기도에서 먹는 비빔밥보다 맛이 나을 것도 없으니 우리는 ‘왜 추운 겨울, 전주까지 와 고생을 하고 있나?’ 하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누구 하나 대놓고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은 추워 다닐 수 없다 싶을 때 숙소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전주 예찬이 시작된다. 


막내딸이 검색하여 예약하게 된 ‘태조궁’ 호텔은 전통식 건물인 데다 온돌방이었다. 로비는 넓고 편안해 뭔가 쓰는 작업하면서 차를 마시기 좋게 돼 있었고 방은 여자 셋이 묵기에 아늑하고 따뜻했다. 그제야 여행 오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 즐기게 되었다. 조식은 숙박시설 안에 있지 않고 가까운 한식집에 가서 쿠폰을 내면 먹을 수 있었다. 아침부터 12첩 반상이다. 흔한 반찬이었지만 여행 와서 먹는 음식은 또 다르지 않은가? 

    


미술을 전공하는 막내딸은 사물을 오래 보고 자세히 보는 좋은 습관이 있다. 특별한 거리나 전시회를 가면 딸은 우리 뒤를 맨 마지막으로 따라오고 우리는 관찰하는 막내딸을 한참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런 습관이 모여 미술을 잘 할 수 있게 되었나 보다. 


우리나라는 빨리빨리 문화가 대세이니 구경도 빨리해야 하고 감상도 빨리해야 하는데 그림 몇 점 걸어놓은 미술관에서도 막내딸은 한참을 보고 또 보길래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딸이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 서양화를 전공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 그렇게 사물을 오래 보았구나. 그런 모습들이 뇌에 저장되어 그림이라는 아웃풋(output)으로 나오는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런 딸이 새로운 도시에 왔으니, 색다른 전통건물과 문양과 그림 때문에 눈이 쉴 틈이 없었고 호텔에 일찍 귀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춥다고 졸라도 막내딸은 조금만 더 보고 가자며 졸랐다. 어렵게 온 여행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 눈에는 별 다른 것 없고 TV 사극에서 많이 보던 건물이고 특별할 것 없는 벽화인데 딸아이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진 찍고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벽화마을의 좁은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벽 가득 인상적인 그림들을 그려 놓은 것에 놀라기도 하고 한참을 멈춰서서 구도를 보기도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960년, 1970년 우리나라가 개발을 시작하던 시기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해 놓은 테마파크인 ‘난장’에서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내게는 익숙한 사물이나 풍경이 막내딸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라 설명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정말 저랬어? 저런게 있었어? 엄마도 저렇게 살았어? 저런 거 써봤어?’ 하며 질문을 퍼부었다. 2시간 넘게 구경 하고 잡아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지치고 힘들어 더는 구경할 수 없는 지경인데 딸은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저녁은 ‘난장’과 가장 가까운 식당에서 먹었다. 구경하고 나와서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파 아무 곳이나 가자고 들른 곳이다.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던 차에 지나가던 행인이 한마디 툭 던지고 간다. ‘그 집 음식 맛있어요’ 우리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보아도 관광객인거 같은데 식당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나보다.  

     

전주에서 느낀 것은 온 시민이 약속이나 한 듯 친절하다는 거다. 주방에서 한참을 뚝딱 뚝딱 무슨 소린가 나기는 하고 우리는 ‘알차게 뭔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채워지기에 이곳 음식이 과연 충분할까?’로 초조해져 갔다. 백순두부가 먼저 등장했다. 진짜배기다. 해물파전, 사이즈는 작지만 제대로다. 메인 요리인 떡갈비를 입에 넣은 순간 우리는 눈을 마주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싹싹 비우고 추가 반찬까지 요구해서 먹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는 행복이다. 그곳은 ‘매당’이라는 한식당이다.     




‘남부시장의 청년몰’에서 찾은 ‘백수의 찬’은 다시 가고 싶은 일식 맛집이다. 심야식당을 연상시키는 좁은 실내에서는 두 팀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고민하고 선택한 메뉴는 ‘하울 정식과 야끼소바, 크로켓 3피스’다. 시간이 꽤 걸려 하나씩 우리 테이블에 메뉴가 놓일 때마다 감탄이 새어 나온다. 


아기자기한 실내 분위기에 취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음식이 나오자마자 동공이 커지며 냄새라도 날아갈 새라 얼른 사진부터 찍어두었다. 야끼소바부터 맛본다. 탱글탱글 면발에 알맞게 둘러쳐진 마요네즈 소스, 가쓰오부시의 흔들림, 락교, 양배추 그리고 간장 양념이 어우러진 맛으로 입안이 꽉 찬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이 소피에게 만들어준 정식, 이렇게 독특한 메뉴를 생각해 내다니 놀라웠다. 두툼한 베이컨에 양파와 달걀, 그리고 바게트가 푸짐하게 놓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것저것 맛보느라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방점을 찍은 것은 크로켓 3피스다. 예상한 크로켓 사이즈의 약 2배 정도 되는 큰 세 덩어리가 나왔다. 


안은 감자 외에 양파와 치즈로 꽉 차 있고 나이프로 자르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엄청난 사이즈의 크로켓이었다. 입 안 가득 담백하고 고소한 튀김의 맛이 퍼지니 서로의 표정과 손짓으로 행복을 표현했다. 광산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았어도 이보다 행복할까? 그 순간 우리는 행복의 끝에 서 있다. 전주에 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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