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이탈 경험
팔봉산 6봉부터는 내 몸인데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너덜너덜했다. 주유소 앞 바람인형처럼 중심을 못 잡고 팔은 축 쳐지고 다리도 떨렸다. 그런데도 내려가자는 말은 하기 싫었다. 뭔가 알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오히려 나를 더 자극하는 것 같았다. 육체적 고통으로 심리적 고통을 덮고 싶었다고 할까? 7봉을 내려와 이제 8봉만을 앞에 두고 있었다. 표지판에는 ‘제일 험난한 봉우리니 무리하지 말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었고 7봉과 8봉 사이에도 하산길이 있었다.
숨은 턱에 차고 몸은 누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쑤시고 정신이 혼곤하다. 이때 남편이 내뱉은 의외의 말. “이제 가자. 8봉을 가는 건 무리야.” 잠깐 의심했다. ‘어? 이럴 사람이 아닌데.’ 남편은 중도 포기를 극도로 싫어하고 왠만해서는 힘들다고 하던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이다. 분명히 8봉까지 완주하자고 할 줄 알았다. ‘팔봉산에서 8봉을 안가고 내려간다니, 말도 안 되지 않는가?’ 하지만 반대할 자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괜한 자신감에 무리하다 다리라도 삐끗하면 이만큼 온 것도 다 도로 아미타불이다. 결국 사이 길로 내려와 다시 밋밋한 모래사장을 비척거리며 초연한 표정으로 걸어갔다. 등산하고 저녁 늦게라도 집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두 사람의 만장일치로 다음 날 올라가기로 했다. 온몸이 후들거려 장거리 이동할 자신이 없었다.
이병률은 ‘내 옆에 있는 사람’에서 말한다.
산은 어렵다. 쉬운 것에 가닿으려면 산은 아니다. 쉬운 인생을 살려는 사람에게 산은 아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쉽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쉽지 않은 것이 우리를 달라지게 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이 추측은 작게나마 진실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산 하나 쉽게 갈 수 있는, 올라가는 척 할 수 있는 산은 없다. 공부하는 척, 사랑하는 척은 할 수 있지만 등산은 하는 척을 할 수 없다.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것 말고는 위선을 부릴 수 있는 속임수가 없다. 팔봉산은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지만 험난하고 어려운 산이다. 자칫 한눈을 팔면 미끄러지거나 추락할 위험이 높다. 평소에 운동을 하고 근력도 있는 사람들이 도전해볼만한 산이다. 그나마 필라테스로 유연성을 길러 놓아서 심리적으로 덜 겁을 먹고 시도해보았다. 7봉까지만 갔어도 팔봉산의 거칠음은 충분히 느꼈고 다음에는 파악했으니 수월하게 올라갈 수도 있을 듯하다. 마지막 봉우리의 맛은 또 어떨까? 기대된다. 다음에 1봉부터 다시 올라가자는 남편의 말에 좋다고 응수는 했지만 속으로는 낙담했다. ‘굳이 다시 1봉부터 갈 필요가 있을까?’
가파른 길을 내려간 다음 날 무릎이 시큰거려 한동안 등산을 하지 못했다. 돈 안들이고 남편과 그나마 마음이 통해 출입하는 곳이 산인데 등산을 하지 못하니 소통도 잘 안되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은 순도 100% 진리다. 잃고 나면 돌아가는 길이 구만리다. 그나마도 원상회복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걸을 수만 있어도 행복한 나이가 되었다. 관절이 아우성치는 통에 평지도 걷기 힘들어진 지인들을 보며 ‘다리라도 잘 보전해야겠다’ 다짐한다. 이제는 무리하며 객기부리는 나이를 넘어서니 산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