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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Sep 15. 2024

훌륭한 짝

팥으로 만든 모든 걸 좋아한다. 대표적인 음식인 팥죽, 팥빵, 찹쌀떡, 팥 칼국수, 팥빙수등 제대로 된 팥으로 정성껏 만든 음식이면 찾아다니며 먹는다. 전주 ‘고신당’에는 이른 저녁을 먹고 KTX를 타려는 우리에게 안성맞춤의 메뉴가 있었다. ‘이걸 먹고 배가 찰까?’ 의문을 안고 문을 열었다. ‘단팥죽이 너무 달면 어쩌지? 단팥죽 양은 얼마나 될까?’ 먹는 것 앞에서 무슨 시험이라도 치르러 가는 것처럼 긴장한다. 이미 비빔밥과 떡갈비에 질려 선택지가 없었다. 단팥죽 3인분에 가래떡 구이 2인분을 시켰다. 잠시 후 우리 앞에 흡사 보온 도시락 용기와도 같은 곳에 담긴 팥죽이 놓인다.     

 

뚜껑을 열자마자 “우와!”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도대체 뭐야?” 작은 찰떡, 밤, 여러 가지 견과류가 위에 꽉 들어차 있다. 뜨끈한 죽을 한입 떠 입에 넣어본다. 달지도 않으면서 주밀한데도 부드러운 맛이다. 다른 재료와 섞어 먹으니 든든하다. 뒤이어 나온 가래떡 구이. 아주 통통한 가래떡을 3등분한 크기로 높이 쌓아 올렸다. 구운 떡을 조청에 찍어 먹는다. 쫀득쫀득 달콤달콤, 마음속에 행복의 파동이 인다. ‘팥죽과 가래떡이 원래 이렇게 훌륭한 짝이었나?’   

   

정신없이 그릇이 비워지고 사장님께 잘 먹었다는 인사를 따뜻이 건네고 나온다. ‘왜 이렇게 고마운 거야?’ 돈을 냈는데 우리가 더 고마워한다. ‘우리의 전주 여행을 행복하게 꽉 채워줘서 고마워요’ 잊지 않고 또 오고 싶다. 오로지 이 음식들을 맛보기 위해서. 여행에서 돌아오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음식이다. 장소와 음식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일본 도쿄에 갔을 때도 단팥빵 집을 찾아갔었다. ‘무슨 무슨 집이 유명하다더라’ 하면 그 집을 찾아가지 않는 편이다. 사람이 많은 것이 부담스럽고 막상 가 보면 실망할 때가 더러 있었기 때문일거다. 남들은 유명한 곳을 일부러 찾아간다지만 그런 곳을 대부분 스킵하는 편이다. 남들이 안 가는, 이름 없는, 우연히 발견한 맛집을 좋아한다. 


이 단팥빵 집은 오래된 집이고 높은 건물 맨 꼭대기에 거대한 단팥빵 사진이 걸려 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집이다. 1층은 베이커리로, 다양한 종류의 빵을 팔고 있다. 일본답게 패키지가 훌륭해 꼭 빵을 사가고 싶다는 열망이 불일 듯 인다. 종류가 많아 고르는 재미가 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여러 개 사보았다. 기본적인 맛부터 여러 가지 다양한 맛의 빵을 구매했다.     


기대가 컸던가? 특별한 맛일 거라 기대한 것과 달리 맛은 평범했다. 유명하다니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한번 이름이 나면 알아서들 찾아오니 가속이 붙어 손님이 불어났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맛의 특별함이 아니라 그들이 지켜온 전통과 시간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 아닐까? 유명하다는 팥빵을 먹어보았다는 것이 여행에 하나의 이벤트가 될 수도 있다. 여행이 별건가? 여행은 무용한 것이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먹고 마시고 놀러 가는 것이다. 2층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었는데 명단을 보니 대기가 10팀이 넘었다. 어딜 가나 유명한 곳이라면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인데 기다림이 힘들다. 맛보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팥’하면 생각나는 건 어렸을 때 엄마가 쑤어주시던 팥죽이다. ‘엄마가 부활하셔서 팥죽을 쑤어보시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하다. 맛이란 무엇일까? 달고 자극적이며 가끔 고급스러운 음식을 맛본 나에게 엄마가 쑤어주시던 옛날 그대로의 맛이 날까? 옛날에는 달디단 디저트가 없었으니 팥죽이 그리 맛있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럼 옛날부터 먹던 된장찌개, 김치째개, 비빔밥과 불고기를 왜 우리는 지금도 즐겨먹는가? 엄마가 쑤어주시던 팥의 원형 그대로의 맛은 몇천 년이 흘러도 맛있을거라고 믿는다. 정말 맛있는 건 언제나 우리의 미감을 자극하고 만족시켜 줄 것이다.     

 

죽을 파는 곳에서도 언제나 팥죽을 사 먹는데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엄마가 쑤어주신 것만 못하다. 동지나 이사 갔을 때 만들어 맛있게 먹고 이웃에게도 나눠주시던 팥죽이 그립다. 팥죽은 추운 겨울 먹어야 제맛이고 새알심이 동글동글, 쫀득쫀득하게 들어가야 제대로다. 고소하고 담백하며 푸근한 맛이다. 음식이 마음을 위로해주고 안아주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팥죽의 맛이 그립다.     

 



외식할 때 자주 찾게 되는 메뉴들이 있다. 이제 보니 훌륭한 짝들이다. 비빔밥에 묵무침집을 잘하는 집에 찾아간다. 다양한 야채를 섭취할 수 있고 무슨 양념을 어떤 비율로 했는지 궁금한 묵무침이 있다. 또 하나는 막국수에 전병이다. 지하철역 앞에 자주 가는 집이 있다. 전병을 직접 부친다. 안에 들어가는 소도 무채로 이루어져 있고 알맞게 익어 맛있다. 요즘 전병을 직접 부쳐 파는 집은 많지 않다. 냉동으로 된 것을 데워서 내 올 뿐이다. 아마 시장에 가면 부치는 전병집이 있을지도 모른다. 막국수는 평범한 맛인데 전병 때문에 간다. 따끈한 전병에 새콤달콤 막국수는 잘 어우러지는 짝이다.   

   

구수하고 달콤한 우동 국물과 함께 먹는 일본식 튀김은 꼭 끼워줘야겠다. 추운 겨울, 탱글한 면발에 뜨거운 우동 국물과 갖은 야채 튀김은 제대로 즐기고 싶은 궁합 좋은 음식이다. 느끼한 튀김의 맛을 우동 국물이 잡아주니 계속 먹을 수 있다. 고구마, 연근, 고추, 깻잎 튀김의 바삭한 소리와 식감은 더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가쓰오부시 맛이 느껴지는 깊은 맛의 우동 국물과 굵은 면발은 행복한 포만감을 준다.    

  


적당한 식도락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맛집을 찾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먹는 것만을 위해 몇 시간씩 운전해 가본 적이 없으니 그런 사람들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았었다. 전주에 와서 이것저것 먹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음식만을 위해 다시 찾아올 수도 있겠구나!’    

  

남의 행동을 나만의 잣대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말할 일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도 바뀐다. 비난하던 그 행동을 언젠가 나도 하게 될 수 있으니 절대로 안 된다느니, 나는 그럴 리 없다느니 등의 단정 짓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루 세끼를 빵으로 먹을 수 있다고 큰소리 쳤었는데 요즘은 빵을 멀리한다. 헤비한 식감의 빵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탈이나 소화제를 먹고 며칠을 고생한다. 나이 들면서 모든 것을 물 흘러가듯이 받아들여야 한다지만 먹는 것마저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다. 소화 가능한 것을 조금씩 맛볼 수 있었던 전주 여행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훌륭한 짝이 또 뭐가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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