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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Sep 23. 2024

무너진 기대

교사생활 11년 차 되던 해에 유학을 떠났다. 마음이 지치고 아이들에게는 ‘내가 좋은 영어 사용자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었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마음대로 회화가 되지 않고 공부할 시간도 없었다. 학교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잡무 처리와 회의, 연수는 하루를 버겁게 했고 집에 오면 집안일에 따로 공부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겠구나’. 지루한 진창에 빠진 듯 허우적대는 내 모습에 지쳐 갔고 획기적인 변화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되도록 영어로 100%진행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실력을 탓하며 ‘난 너무 능력이 없는 교사야’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던 차에 떠난 유학 생활이었기에 떠나는 것만으로도, 교육 현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교사생활을 반성해본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방학이 있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다. 일반 직장인들이 보기에 유급휴가가 보통 일년에 2달이나 되는 교사들이 마냥 부러울 수도 있다. 방학 기간 동안 교사들은 바쁘다. 각종 연수, 출장, 교육으로 마냥 길게 쉴 수 없다. 가족과도 며칠 시간을 보내야 하고 평소에 매여있던 몸인 만큼 밀린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방학은 누가 낚아채듯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    

  



주어진 1년 6개월이라는 소중한 유학기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요리해서 최고의 효과를 창출해 낼 것인가? 처음에는 계획도 많았다. ‘대학원 수업이 일주일에 이틀이니 다른 공부를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약 일주일 후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수업을 듣기 위한 준비가 길었다. 수업 준비와 에세이 쓰기가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일도 촉박하다. 프리젠테이션 준비는 시간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소요되었다. 팀별 과제도 있어 바쁜 일정을 조율해가며 다른 나라 학생들과 소통해 결과를 만들어내야했다. 수업 외에 영어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의지는 강도 낮은 나뭇가지처럼 쉽게 뚝 부러졌다.   

   

일부러 한국인이 많지 않다는 멜번을 선택해 왔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는 결국 한국인을 찾게 된다. 외국에 잠깐 여행 가는것과 살러 가는 것은 다르다. 막연히 생각하는 현장에 와서 부딫히는 현실은 많이 다르다. 인생의 지축을 뒤흔들 이민을 결심하고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정착하려고 현지에서 노력을 하겠는가? 그러나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고 오히려 한국에서 사는 것만 못하다 확신이 들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한국에서 준비를 해 간다고 해도 막상 현지에서 만나는 문제와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다. 준비를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현지에서 나에게 도움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갈 용기를 내었는지 내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내가 멘탈이 약하다고 엄살을 떨어도 남편은 나를 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자 혼자 먼 나라에 가 공부를 할 사람이면 보통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르니까 갔지, 내가 알면 갔겠어? 결혼도 모르니까 했지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안했지” 


하며 화제를 돌린다. 늘 반복되는 우리의 대화 레퍼토리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가면 영어실력이 껑충 갑자기 엄청나게 향상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온통 영어세상이니 그런 기대를 할만도 하다. 눈 떠서 나가면 무조건 영어로 얘기를 해야하고 공부도 다 영어로 하니 실력이 얼마나 좋아질까? ‘와, 난 이제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될거야’ 라는 순진하고 어림없는 생각을 품고 갔었다.     

언어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운동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몸에 익히는 운동처럼 뇌에 회로가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다. 뇌가 굳고 경직된 상태에서 발음도 모방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뉴질랜드’를 발음해도 원어민이 듣기에는 이상하다는 거다. 뉴질랜드 남자친구를 둔 한국인 동생이 있었는데 여러번 만나 커피도 마시고 밥도 함께 먹었다. 내 발음이 어색한지 자꾸 교정해주었다. 아무리 들어도 똑같은데 수정해주어서 따라하며 많이 웃었다.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포기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를 모르고 흉내를 내려고 해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원어민처럼 하기가 불가능했다.    

  

영어가 늘기는커녕 더 쪼그라들어서 나중에는 입을 열기가 무서웠다. 겨우 알아는 들었는데 대답을 해야하고 다시 돌아오는 질문에 또 대답을 찾아야하는데 내가 말하는 답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대화의 실마리를 이해해 반응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흐름을 파악하지 못할 때가 제일 난감하다. 단어 몇 개만 알아들을 뿐 질문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공부도 그렇지만 쉐어하우스에 같이 사는 남학생의 발음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가끔 마주치면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언어가 아니라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내는 것같다. 이름은 ‘데미안’ 얼굴도 꿈꾸듯이 그렇게 생겼는데 말도 흐르듯이 하는 바람에 한 번도 속시원히 대화를 한 기억이 없다. ‘데미안’은 끝까지 날 괴롭히는구나. 아무리 읽어도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고전이라고 평가되는 그 작품의 요지를 알 수 없으니 왜 그것이 당당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멜번에서 만난 또 다른 ‘데미안’도 내게는 어려웠다. 아무리 소 닭보듯 한다고 해도 24평 남짓한 공간에 방 하나씩 차지하고 살고 있으니 가끔 대화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입안 저 깊숙이 내장에서 끌어 올려지는 그의 발음과 음성은 내게 그저 소리 덩어리로 들렸다. 단어를 끊지도 않고 연음으로 계속 끌면서 붙여 말하는데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못 알아들으니 그도 답답했는지 더 말을 걸지 않았다. 대화를 해야 하는데 대화할 사람이 한 명 또 줄어 들었다.   

   

성격도 한 몫한다. 아무 말이나 내뱉고 해보고 창피를 당하든 말든 무감하게 굴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성격이 못 된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알아들은 것에 대해 반응하고 누가 물어보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니 영어가 늘 리가 없다. 더 많은 기회를 잡았어야 하는데 성격상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알고 보면 남들이 하는 대화도 건져보면 건더기가 하나도 없다. 


꼭 내용이 있는 무언가를 얘기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에 사로잡혀 아무말도 안 하고 있던 내가 한심했지만 그렇게 태어났으니 거스를 수가 없었다. 기대와 달랐지만 그래도 돌아와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곳에서의 생활은 영어가 아니라도 내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것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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