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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Oct 21. 2024

멜번이 내게 준 것

*예술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은 예술을 향하고 있지 않다. 예술의 유일한 의미는 삶이다. 삶이 소망하는 것들을 예술이 드러냈다.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예술이란 결국 삶의 문제다. 예술은 삶을 고양시키는 것을 찬미하고 삶을 약화시키는 것들에 반대해왔다. 예술이 예술로만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술은 오직 삶을 위해서만, 삶에 근거해서만 존재해 왔다.     


니체의 예술 예찬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예술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멜번은 유난히 예술 관련 축제가 많다. 방송출연에 재미가 들린 나는 ‘멜번 인터내셔널 아트 페스티벌(Melbourne International Arts Festival)’을 촬영했다.    

  

‘유럽을 닮은 도시 멜번’이라는 제목으로 멜번의 전반적인 것을 담으려 했다. 멜번을 관통하는 야라강이라든가 전통적인 건물, 현대적인 건물들을 번갈아 촬영했다. 그리고 한가로이 강가에서 차를 마시는 카페의 사람들, 트램들도 카메라에 담았다.      


패더레이션 스퀘어(Federation Square-멜번의 중앙역)에서 춤 강의와 공연이 있어 일반 대중들이 많이 참여하니 역동적인 모습을 찍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과제로 에세이 두 개를 써야 해서 매일 다운타운을 나갈 수는 없었다. 나의 목적은 공부하는 것이지, 방송 촬영이 아니지 않은가?      


키즈댄싱(Kids dancing)이라고 해서 주말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면과 라인댄싱, 고고, 탱고만 촬영했다. 그 모습은 촬영을 떠나 보는 내내 참 즐거웠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멜번 시민들과 관광객 등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꽉 메운다.      


무대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아래 광장에서 친구들, 가족들과 음악에 맞춰 춤을 따라하며 즐거워했다. 나이 든 분들이나 어린아이들이 춤추는 모습이 제일 흐뭇하고 보기 좋았다.    

 



가든 페스티벌도 열려서 열심히 촬영했다. 꽃과 식물로 만든 의상, 침대 전체를 과일과 꽃으로 장식한 디스플레이 등 볼거리가 넘쳤다. 정원 전체에 물품과 전시물을 배치해 오며 가며 보는 재미가 넘쳤다. 구경하랴 촬영하랴 바쁘게 정원을 돌아다녔다. 꽂꽂이 한 정돈된 꽃과 야생화까지 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결과물도 많이 달라졌다. 이들이 얼마나 꽃과 식물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만큼 생활에 여유도 있는 거겠지.   

  

교사다 보니 학교에 관심이 많아 공립학교, 사립학교 할 것 없이 학교를 답사했다. 기회가 되는대로 찾아다녔는데 오가는 길은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로도 1시간 30분 걸리는 학교에도 가보았다. 가는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집마다 주택의 모양이 다르고 앞에는 아기자기하게 정원을 가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동화에 나오는 일곱난장이 모형을 정원에 배치해 당장이라도 집안에서 백설공주가 나올 것같이 꾸며놓은 집도 있고 정원에 벤치는 기본이요, 흔들 그네까지 설치한 집도 있었다. 주거하는 사람의 개성대로 가꾼 정원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마치 주택과 정원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동네를 버스를 타고 구경하다 보니 언제 시간이 흘렀나싶게 재미있었다. 집안의 정원도 잘 가꾸는 문화가 정착되어 가든 페스티벌이 성황리에 이루어진다. 모두들 나와 정원을 좀 더 예쁘고 독특하게 꾸밀 수 있는 소품이나 재료들을 구경하고 구매한다.


어딜 가나 녹지가 풍부하다. 학교에서 도보로 40분 걸리는 집에서 살았는데 오가는 길도 즐거웠다. 이유는 가로수가 다양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무만 보면서 걷다보면 어느새 학교에, 그리고 집에 도착해있었다. 

향기도 퍼진다. 숲속도 아닌 길거리에서 나무 향이 진하게 풍겨온다. 그 기억은 아직도 비현실적으로 남아있다. 등산할 때 나무 향이 진하게 풍겨오면 갑자기 시공간을 이동해 멜번이 생각나기도 한다.          




녹화 테잎 4개를 마련한 후 방송 참가 신청을 했고 연락을 기다렸다. 일주일을 넘기고 거의 포기할 때쯤 담당 작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KBS신관에 와서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라는 얘기였다. 기분이 붕 뜨고 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열심히 발품을 팔며 찍은 필름이 채택되어 방송을 탄다고 생각하니 더욱 보람이 느껴졌다. 방송국에 가서 장면을 보며 찍은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11시부터 2시까지 작가와 함께 얘기를 주고 받으며 필름을 보고 녹화는 그 다음 주 수요일에 했다.     

 

무작위로 찍은 화면을 편집한 엔지니어들의 능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오! 그럴듯한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한 건 뭐든 서툴러도 기특한 생각이 든다. 전문가들이 편집을 잘 해놓으니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흩어져 있는 구슬을 잘 꿰어놓는 그들의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오히려 거칠고 나이브해서 좋은 것도 있다며 스스로 위로해본다.   

  

생생한 현장을 보통사람의 눈으로 지켜본 것을 촬영한 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한 시간에 촬영한 장면들을 방영하는 ‘세상은 넓다’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준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출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콘텐츠 자체를 제작하는 것이다. 편집은 전문가가 하지만 초본은 출연자가 제공하는 것이니 말이다.  

   

멜번의 속살을 나 나름의 시각으로 체험하고 카메라에 담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은 의미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체험을 하게 해준 멜번이 다시 한번 더 고맙게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송출연은 이 도시를 더 의미 있고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언제나 마음 속에 천국으로 담겨있는 멜번, 떠난 후 20년이 넘도록 다시 가보지 못했다.   

   

일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새로이 여행할 곳도 많으니 후순위로 밀렸었다. 다시 가면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겨줄까? 그들도 시간을 비껴갈 수 없으니 어떻게든 변했으리라. 그대로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 출처: 『혼자일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프레드리히 니체/포레스트북스/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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