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 Oct 28. 2024

'나중은 없다' (에필로그)

영어를 공부한다고 무모하게 떠난 호주 유학은 많은 걸 남겨주었다. 영어는 생각보다 늘지 않았지만 돌아와 생각해보면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우지 않았나 싶다.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의식주 문화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배운 것이 많다. 궁금하기만 하던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직접 겪어보니 생각한 것과 다른 점도 있고 또 별 다를 것 없는 면들도 있었다.

      

사람 사는 것의 기본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사랑하고 먹고 일하고 때로 쉬며 삶을 즐긴다. 다른 점은 아파트가 포화상태인 우리의 주거문화와는 달리 주택 양식이 많다는 것, 자연의 규모가 크다는 것 정도다. 속도를 중시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여유가 있다는 것도 부러운 대상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개성 있게 살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어딜 가나 푸릇한 잔디가 끝없이 펼쳐져,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끝이 보이지 않는 키 큰 나무들이 아무렇지 않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멜번이 자연과 가까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주택가를 걸어도 버스를 타도 보는 내내 눈이 즐겁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친절했다.      


남편의 거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앞만 보고 추진했던 유학. 그때는 무슨 에너지로 그렇게 저돌적으로 행동했던 것일까? 내 인생 모토는 ‘나중은 없다’이다. 더 준비해서 나중에 하리라 마음 먹지만 그때 되면 다른 장애물이 나타난다. 마음이 열정으로 불탈 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생각한 것을 추진하고 실천해야 한다. 거의 불모지였던 곳을 혼자 개간해서 땅을 만든 격이다.   

    



주변에 호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없었고 당연히 아는 지인도 없었다. 그 멀고 먼 낯선 땅에 가서 살며 공부를 하겠다는 나의 무모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부끄럽지만 나는 혼자 아파트에서 밤을 지내지 못한다. 꼭 누군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 내가 지구 반대편 먼 나라에서 혼자 살겠다고 마음을 먹다니... 그때는 내가 낯설게 느껴질만큼 열의가 넘쳤었다. 도전이나 성취에 도취되어 있었나?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꼭 현지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때를 놓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고 삶이 지루해 견딜 수 없었다. 그때 호주로 날아가지 않았더라면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모든 장애물을 다 헤치고 나가 결국 목적지에 다다랐다. ‘가고 싶어서 간 거잖아. 무슨 불만이야? 불평할 자격 있어?’ 라고 비난받을 것 같아 힘들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     


소매치기도 당했다. 한국에서 동생이 휴가차 놀러와 다운타운을 구경하다 가방에 있는 지갑을 통째로 도난당했다. 꽤 많은 현금이 들어있으니 놀라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돈이 필요하니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상황설명을 해야 했다. 남편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며 순순히 돈을 보내 주었다. 돈이 많아서 유학을 간 것이 아니다. 대출받아서 공부하고 돌아와 일하며 모두 갚았다.    

  

무엇이든 어려운 길,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갈 때 장애물은 수 없이 많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 자신이 없으면 타성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원하는 것이 차고 넘치면 도전하는 것이다. 시도하고 이겨내면 새로운 세상이 찾아온다. 상상해보지 못한 거대한 세상이 펼쳐진다.      


호주 멜번보다 더 멋있고 볼거리가 많은 도시들이 있다. 그러나 그곳이 특별한 이유는 내 젊은날의 한 때를 보냈기 때문이리라. 외로웠고 힘들었고 또 많이 울었다. 영어가 너무 안돼서, 가족이 보고 싶어서, 저녁의 거리가 쓸쓸해서 힘들었다. 한국이 많이 그립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는 그곳에서의 즐거운 기억, 아름다운 풍경, 세련되고 멋있는 거리들이 더 기억에 각인되어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 멜번, 가지 않았으면 만날 수 없었던 곳, 그곳의 추억들.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어려워도 조금씩 구멍을 내서 그 벽을 뚫고 뚫어 길을 만들라. 그리고 새로운 곳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라. 두렵고 떨리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추억과 풍광을 만나게 되리라. 생각으로는 얻을 수 없는 현존하는 세계로 나아가길 권한다.     


여자라고 해서, 결혼했다고 해서 못할 건 없다. 없던 길도 만들면 길이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길만 가겠다면 새로운 체험은 할 수 없다.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면 영영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단 그것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가장 두려웠다. ‘학위를 못받으면 어떡하지? 공부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까?’ 등 온갖 문제에 대한 상상으로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다. 결국 그런 것을 모두 녹여낼 수 있는 건 열정이었다.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지, 꼭 해야 하는지 자문했다.    

  

하지 않으면 안될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 장애물 따위는 넘길 수 있다.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질 것이다.  영어를 얻으러 갔다가 자연과 사람이라는 열매를 잔뜩 담아 왔다. 기회가 닿는 대로 자주 멜번으로 날아가 그곳의 향긋한 자연과 사람을 만나고 싶다. 무모했지만 지나고 보니 별것도 아니다. 시도하지 않았다면 마음속의 별 같은 멜번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전 14화 멜번이 내게 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