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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Jun 22. 2022

벽은 낙관적이다.

  내가 살던 미딩에서 조금만 더 가면 하노이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 벽은 서민들의 생활 정보 게시판이다. 각종 전화번호는 하수구 막힌 곳을 뚫어 주거나, 녹슬고 무딘 칼을 갈아주거나, 부서진 찬장을 붙여주거나, 끊어진 선과 파이프를 이어주거나, 고장 난 시계나 선풍기를 고쳐준다는 전화번호란다. 나도 한번 긴급할 때 서비스를 한번 받아 보고 싶다. 그들만의 기술 know-how를 배워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도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 내서 그 벽에 전화번호 0804-096-752 하나 찍고 설레는 마음으로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전화를 기다리고 싶다. 나뭇잎이 떨어져 쌓이는 날 쓸쓸한 남자와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벽창호 같은 남자와 사는 여자와 맹꽁이 같은 여자와 사는 남자도 만나고 싶다. 어딘가 막히고, 무뎌지고, 녹슬고, 금가고, 끊어지고, 들 떨어진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전화번호 하나 찍을 때마다 벽은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사람들의 잔머리와 잔기술을 온통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벽은 포용력이 있어 보인다. 벽은 낙관적이다. 

  한글은 발음만 해도 강약 느낌이 온다. 벽이라 해보면 왠지 남성적이지 않은가. 만약에 벽을 먹이라 했다면 약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ㅁ이 들어간 단어는 왠지 여성적인 것 같다. 맘마, 민들레, 마음, 미나리 등 가볍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오지만 ㅂ 소리는 ㅁ 소리보다 무겁고 가라앉아 안정감이 들고 편안하기도 하다. 누구의 이름 앞에 바보라고 써보라. 벽은 초연하다. 

  벽 받침 ㄱ 소리는 대체로 무뚝뚝하고, 투박하고, 딱딱해서 벽 하면 안도감에 긴장감을 더한다. 언젠가는 무너질 수도, 가둘 수도, 인생을 가로막을 수도 있는 것이 벽이니까, 때로 벽은 사유재산을 구별하고, 인간의 본능인 차별과 거절의 경계이며, 각박한 인정의 상징이며, 인색한 마음 평수를 연상케도 하고 음흉한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벽도 진화한다. 원시시대 동굴 흙벽에서, 돌벽, 철벽으로 더욱 견고해지고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문명에 환호하지만, 시멘트처럼 굳어가는 가슴에 자주 환멸을 느낀다. 차별화가 미덕인 시대에 벽은 그 다양화가 현란하다. 플라스틱, PVC, 유리, 고무, 종이, 알루미늄 그중에 유리 벽은 가장 합리적이고 이기적 상상의 결과물인 것 같다. 다 보여주면서 저도 다 보고 그래서 선팅으로 또 가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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