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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Jan 25. 2022

추억속의 다방(2)

커피(coffee) 한잔의 유혹(Temptation)


추억속의 다방(2)   



  “그래, 겨울은 눈이라도 펑펑내려야 겨울이 맞지.”

야트막하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은 어느새 구멍이 숭숭 뚫린 듯 하얀 눈꽃 송이를 밀가루처럼 뿌려 대기 시작한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이면 그 옛날 다방에서 마시던 아니 맛도 모르며 훌짝거리던 쓴맛이 더욱 간절해진다. 마치 인생의 쓴맛처럼, 다름 아닌 ‘커피(coffee) 한잔’의 유혹(Temptation)이 간절해진다. 우리에겐 언제부턴가 부 터 커피는 일상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중독이 별거인가. 선택이 아니라 반복되면 중독이다. 


  국민 1인당 1년에 몇 잔의 커피를 마실까.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기준 1년에 커피 353잔을 마신다고 한다. 하루에 1잔은 마신다는 의미인데, 세계 평균 소비량 132잔의 2배 이상이다. 하지만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도 다수 있으니 엄청난 양이다. 커피는 예전 ‘숭늉’의 자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계속해서 다방의 유래를 알아보기로 하자.

  3‧1운동 후인 1923년경에 명치 정(명동)과 본정(충무로)에 “후다미”라는 이름의 이땅에서 근대적 다방의 효시가 되는 최초의 다방이 생겼다. 이어서 본정 2정목에 있던 식료품점 “가메야”안에 ‘금강산’이라는 다방이 생겼다. 두 곳 모두 일본인이 경영했다고 한다. 


  한국인이 세우고 운영한 다방은 1927년 “캬캬듀”라는 것이 처음인데 관훈동 입구의 3층벽돌집 아래층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주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으로 “춘희” “장한몽” 등의 영화를 감독했고, 나운규, 전창근 등의 배우를 발굴한 이경손이었다. 화와이에서 온 미모의 여인과 같이 운영했는데, 실내 장식은 인도풍을 흉내내어 삼베천에 조선 가면을 걸고 촛불을 켜놓는 등 돋특햇다고 한다. 하지만 이경손은 경영에는 익숙하지 않아 불과 수개월만에 문을 닫고 상하이를 거쳐 타이로 갔고 하와이에서 왔다는 미모의 여인 역시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종로2가에 “멕시코다방”이 생긴 것은 ‘카카듀’ 개점 직후의 일인데, 주인은 일본 미술학교 도안과를 나온 김용규였다. 화가 도상봉, 사진작가 이해선, 무대장치가 김정항, 화가 구본웅 등 당시 한반도를 대표하는 문화인들이 김용규를 위해 의자와 테이블을 만드는 등 개점을 도왔다고 한다. 멕시코다방은 차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50여 가지의 양주도 갖춰 실비로 제공하고, 손님들의 만남의 장소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춘원 이광수, 석송 김형원, 홍종인, 김을한, 도상봉, 복혜숙, 서월영 등, 장안의 각계각층의 유명인사가 모두 모였다. 


  따라서 일본인의 매서운 감시를 받아 주인 김용규는 감옥까지 갔다 왔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가 가난했던 때라 외상이 쌓였고 1931년 8월에 문을 닫을 때는 외상값이 무려 3,500원이 되었다. 차 한잔에 10원 하던 시절이었다.  


  1930년대인데 먼저 오늘 날의 소공동에 "낙랑파라"가 등장한다. 이 낙랑파라의 주인은 도쿄 우에노 미술학교 도안과를 나온 '이순석'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던 그때까지의 다방 경영과는 달리 수지를 맞춰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던 그때까지의 다방 경영과는 달리 수지를 맞춰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한것이 낙랑파라의 큰 특징이었다.  1938년에 화가 구본웅이 발행한 미술적 "청색지" 1호에 익명의 노다객이 쓴 "경성다방성쇠기"에는 이 다방이 적자를 보지 않고 수지를 맞추게 된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그것이 위치한 장소가 대담해 일본인 손님들도 많이 출입했던 점, 

    둘째,   그때까지 종로 근처 다방의 큰 페단이었던 기생이나 술주정꾼의 출입이 거의 없게 되어 다객의 취향에 맞았던 점, 

    셋째,   금요일마다 명곡의 신보를 들리는가 하면 투르게네프 100년제를 거행하는 등 문화면에서 뒤어났다는 점.


  이 낙랑파라는 뒷날 유명한 여배우 김연실이 인계받아 1940년대까지 운영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천재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 실 내 시공만 하고 팔아넘긴 "식스나인(69)이라는 다방이 있었고, 뒤이어 그의 나이 24세가 되는 1933년 7월에 휴양차 갔던 온천장 신천에서 데려온 애인과 함께 종로 1정목에 개업한 다방 "제비"가 유명했다.   


  (다음에 계속)                                 

※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추억을 더듬다 보니 어느새 다방 이야기를 한없이 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들을 토대로 최초의 다방을 적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읽는 내내 즐거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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