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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Jan 24. 2022

추억속의 다방(1)

“One more Cop of  the Coffee”

추억 속의 다방(1)



          

  인간이면 누구나 추억은 있게 마련이다. 형님의 일곱 살짜리 손주 녀석도 말할 때 보면 “옛날에 ···.”하고 말하는 것을 볼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제각기 지닌 삶의 무게가 틀리듯이 아마 추억하는 일들도 제각각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만들어 낸 신조어 중에 가장 대중 속을 파고들었던 단어가 있다면 아마 세대를 아우르는 뜻이 담겨 있는 7080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물론 그 시절에 최소한 중고등학교에 다녔다든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정말 그 시절이 마음의 고향을 불러내는 향수 鄕愁와 같을 것이다. 한 번쯤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난 두말하지 않고 한곳을 말한다. 70년대 끝자락부터 옛날 다방에 들락날락하던 나였기에 잊지 못할 추억은 여전히 커다란 마음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70년대의 다방만 해도 낭만이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눈물 또한 공존 했음을 나는 잘 안다.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시름을 덜어낸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멋들어진 추억도 있다. 어쩌다 열리는 축구 시합이라도 하는 날은 서민들의 단체 관람장이 되었고, 어른들은 펑퍼짐한 마담의 엉덩이를 커피 몇 잔 값으로 두드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랑방으로, 젊은이들은 학구열을 연장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으로, 또 죽돌이라는 속어와 함께 혼기를 앞둔 남녀의 맞선 공간도 되었다. 기타 등등의 필요로 이용되던 한마디로 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명소였음을 새삼스레 알 수 있다.     

  언제나 계산대에는 중년 여성이 마담으로 앉아있었고, ‘레지’(lady)라고 불리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커피를 날라주는 동안에 구슬픈 음악 가락이 손님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그런 형태였다. 시골 읍내는 말할 것도 없고, 시내 중앙통에 있는 다방의 마담이나 레지와의 사이에 사연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든 이들의 사랑방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문학과 예술을 불태운 그들의 아지트이기도, 정치 초년생들의 정책 토론장이기도 했다. 다방을 커피숍이나 카페라 혼돈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어가 주는 어감 또는 질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 다방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었다. 거리엔 한 집 건너 또 한집이 있었고,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던 때도 아마 7,080시대가 아니었을까?     

  과거에 허장강이라는 유명 배우가 다방에 앉아 ”0 마담 이번 일만 잘되면 말이야~“ 운운하며 다방 마담을 꼬드기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던 때가 있다. 1970년대 초 유명 신문기자들이 아침에 다방에 가서 일을 보기 시작하며 마시던 커피가 우리가 알고 있는 달걀노른자를 띄운 모닝커피가 되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사람들에게 든든한 한 끼 대용의 간식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 다방마다 손님 유치를 위해 경쟁을 하듯 달걀 반숙이나 프라이를 서비스하기도 했다.     

  또 애주가들이 만들어 낸 것 중에 전날 술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 위 티나 하이볼 highball을 주문했다. 위 티는 위스키+티, 하이볼은 위스키+소다수 음료다. 6, 70년대에는 외래품 단속으로 한동안 커피, 홍차, 코코아 등을 팔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생겨난 것이 인조 커피란다.     

  인조 커피란 커피대 신 콩을 볶아 콩피를 내놓기도 했고, 70년대 말에 담배꽁초를 섞어 커피를 끓였다는 ‘꽁피사건’이 커피 애호가들을 화나게 한 사건도 일어났었다. 미제 커피 찌꺼기에 톱밥과 콩가루 달걀 껍데기를 섞어 만든 가짜 커피 사범도 잇달아 적발되는 등 웃지 못할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     

  그러는 70년대에 커피 수입이 자유화되었고, 70년대 후반에는 커피 자판기까지 등장하므로 집이나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맛있고 질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커피와 같이 성장한 오디오의 보급률이 늘어나면서 커피와 음악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사람들은 쭈그려 앉아 신청한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홀짝이는 문화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다방은 80년대 이후 급격히 침몰해 갔다. 커피숍이나 술을 곁들여 팔 수 있는 카페로의 업종 전한이 이어졌고 일부는 티켓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매춘을 겸하기도 했다. 철학을, 문학을, 예술을 논하던 사람들도 사라지는 다방을 아쉬워하며 제각기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따라서 물들인 낡은 군용 점퍼를 입고 구석진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온종일 열띤 토론을 하던 청년들도 사라지는 다방 문화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45년 해방과 함께 서울에 60개 정도의 다방이 있었다. 이후 50년 말엔 그것이 1천2백 개로 늘어났고, 63년엔 다시 800개 정도로 줄었다가 71년 1천4백 개, 72년에는 3천 개, 80년엔 4천 개, 87년 9천 개, 89년 1만1천 개로 늘어났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80년대에 늘어난 것은 ‘주다야싸’로 주간은 다방 야간은 술집이 대종을 이루었다고 한다.

  사실 이로써 진짜 다방은 죽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골동품 수준으로 몇 곳만 남아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뒤 씹고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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