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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Jan 26. 2022

추억속의 다방(3)

'one more chance'

  어제는 나름대로 바쁘게 하루를 지냈다.

  최근 5년 사이 집 밖으로 외출하는 빈도가 높지 않던 나로서는 아마도 또 다른 대단한 하루였을는지 모른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익숙하지 않은 전철을 타러 나갔다. 괜신히 시간을 맞추어서 타고 보니 아뿔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좀처럼 실수하지 않던 나로서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빨리 발견했기에 바로 반대 방향으로 가서 다시 탔다. 2022년 들어 처음으로 만나는 모임이라 적잖이 기대도 되고 마음도 설레며 1시간 이상을 음악을 들으며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평균 수명이 많아진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 90%가 나보다는 연상이었고 그나마 두세 명 정도가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으니 말이다. 사실 나도 적지 않은 나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노인정에 60대가 가면 술, 담배 심부름을 한다더니 이런 상황이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융통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무엇이든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을 벽창호라고 하고, 고집불통이라고 놀려댔던 기억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두뇌가 굳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늙으면 고집이 생기는 것일까. 지금 시대는 아이디어 idea와 필링 feeling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럴 때일수록 머리가 굳어지지 않게 유연성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생각과 사고 思考는 대체로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배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 제도는 오직 하나의 정해 精解, 해답만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답이 하나밖에 없는 수학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지만,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모두가 수학 문제와 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 중의 문제인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애매한 문제들이 너무 많이 있고, 정답이 여러 개인 문제도 많다. 자유분방하고 개방된 사회 상황에서는 너무나 많은 변수 變數가 존재한다. 정해 精解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보기로 하자. 서로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어떤 문제를 결말 짖지 못하고 재판장까지 가서 중재를 청하기로 했다.      

  먼저 원고가 사건 발단에 관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재판관은 “그래. 그래. 그렇지”하고 수긍을 했다. 다음은 피고의 차례로 피고 역시 설득력이 뛰어나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판관은 다시 말했다. “그래. 그래. 그렇지” 하는 것이 아닌가. 법정의 서기가 재판관의 그날을 듣고서는 “쌍방이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하고 재판관을 향해 항의 抗議를 했다. 서기의 말을 들은 재판관의 대답은 또다시 “그래. 그래. 그렇지” 였다.     

  진실이란 수학 문제의 해답처럼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시점 視點을 바꾸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노라면 우리는 평범 平凡을 비범 非凡으로, 이상 異常을 정상 正常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 처음으로 생각이 움틀 때 지나치게 명확하다면 상상력의 숨이 막힐 수 있다. 발명이란 누구나 다 같은 것을 보고도 어딘가 다른 것을 생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 효과적인 사고 思考에는 많은 관점 觀點이 필요하다. 창조적인 정신 상태를 위해서는 더러는 유머 감각도 도움이 되리라.     

  따뜻한 커피를 갖고 책상 앞에 와서는 온기가 다식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모르는 사이 생겨난 버릇 중에 하나로 일상이 되었다.


  이상(李箱, 1910~1937) 종로1정 목에 개업한 다방에는 수많은 화가와 문인 때문에 인기를 끄는 듯했으나 역시 경영 미숙으로 2년도 못 버티고 폐업을 했다. 이어서 이상은 다시 인사동에 ‘쓰누“라는 카페를 인수해 운영하다가 다시 실패했고, 1935년 그의 나이 26세 때 혼 마치에 ’무기‘를 직접 설계했으나 개업하기 직전에 양도하고 말았다.     

  이상이 1933년에 제비를 개업한 것을 전후로 종로 일대와 본 정(충무로), 명 치정(명동), 장 곡 천정(소공동) 일대에 많은 다방이 일시에 자리 잡으면서 경성에 다방 문화가 활짝 꽃피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다방은 지금의 한국은행 건너편 상업은행 본점 뒷골목인 장 곡 천정(소공동)에 극작가 유치진柳致眞, 1905~1974 이 다방 ’프라타누‘를 개업해 각종 문학 행사를 많이 개최했고, 배우 복혜숙 卜惠淑, 1904~1982이 인사동 입구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개업해 7~8년간이나 영업했다고 한다. 명동으로 들어서면 ’트로이카’라는 러시아식 다방이 유명했는데 왕년에 정구 선수였던 훗날 토월회 土月會에 들어가 연극을 했던 연 학년 硏 學年이 주인이었고, 다방 ’에리사‘는 음악평론가 김관이 주인으로 음악 감상에 도취하는 ’꿈의 전당‘이었다고 한다. 또 ’살수차‘, ’한강‘ 등의 영화를 감독한 ’방한 준‘이 문을 연 ’라일락‘ 다방은 외상을 잘 주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서울 600년사“ 제4권의 ’다방’을 집필했던 김규현은 1940년대 들어선 후에도 명동, 소공동, 충무로 등에 몇 개의 다방이 있어 성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에 일어난 태평양 전쟁 등으로 19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남자들의 복장도 국방색에 각반을 차고 다녔을 정도로 군사적 경향이 짙어져 1940대 이후 서울 다방의 문화는 일단 끝났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815광복은 실로 어마어마한 희열 喜悅을 이 겨레에 안겨줬다. 거리로, 골목으로, 뛰쳐나와 기쁨을 누렸다. 일본 순사에게 쫓겨 숨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거리로 나와 꿈에 그리던 사람들과 재회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남의 장소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명동, 충무로, 소공동, 종로의 번화가에 다방이 생기기 시작한다. 초창기 다방은 영리 위주의 상업다방이 아니었다. 경영 주체가 영화감독, 배우, 화가, 극작가, 언론인, 시인, 소설가 등 이른바 문예인 이었으며, 찾아오는 손님들 또 한 그들과 유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다방의 풍속도는 광복 후부터 625 전쟁 전까지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순수 문화인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 명동이었다. 속칭 ’명동의 샹송‘으로도 뷸리는 ”세월이 가면“ 의 작사자인 ”박인환(朴寅煥, 1926~1956)“, ”명동시장“이니 ”명동백작“이니 하는 명칭으로 불린 소설가 ”이봉구(李鳳九, 1881~?)“, 그리고 공초 ”오상순(吳相淳, 1894~1963)“, 수주 변영로(卞榮魯, 1898~1961), 시인 조병화(趙炳華, 1921~2003) 등이 대표적인 명동파 문화인들이었고, 그들이 모인 다방은 고전음악을 틀어주었던 ”봉선화“가 처음 이었다. 이어 ”리버티“, ”삼일“, ”에덴“ 등이 문을 열었고, ”마돈나“ ”남강“ ”미네르바“ ”오아시스“ ”고향“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술집도 대성황이라서 ”돌체“ ”휘가로“ ”무궁원“ ”명동장“ 등 주점에는 밤마다 장안의 문화인들이 모여 불야성을 이루었다. 이것이 1947~1948년경 명동의 모습이었다.     

  이 당시 명동은 서울에는 미술 전시회라는 것도 없었고, 아담한 간담회를 열 만한 장소도 없었다. 당시 다방에서는 음악회, 그림이나 사진 전시회, 시낭송회나 문학토론회 등의 문학 행사까지 문화계의 모든 행사가 열리는 중심지였다. 때로는 연극의 무대와 영화관이 되기도 했고, 출판기념회, 동창회, 간담회 등이 열리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종합예술의 장“이었다.

광복 후 명동 일대에서 발원한 다방 문화는 바로 소공동, 을지로로 갔고, 그것이 세종로로 다시 옮겨와 종로 일대로 퍼져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625전쟁을 알았다. 서울에서 꽃피운 다방 문화는 대구, 부산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특히 새롭고 보다 좋은 것,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래된 것이 낡고 허름할지는 몰라도 옛것을 바탕으로 현재 모든 것들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전주에도 오랜 역사를 가진 업체가 사라진다고 하여 일부러 먼 길을 찾은 적이 있었다.      

   전쟁중인 1952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전주 삼양 다방이 아쉬움을 남기며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하여 일부러 찾았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전주 완산구 경원동 한옥마을 인근에 있는 삼양 다방이 지켜지는 과정이 험난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북적이진 않았지만, 간간이 오가는 고령의 어르신들이 적잖았다.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듯한 나무 탁자와 소파가 한눈에 들어왔고 벽면에는 사진 작품과 그림, 그리고 서화가 걸려 옛 흐름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최고령 다방이었던 ’삼양 다방‘

삼양 다방은 지난 1952년 문을 열었다. 오래된 시간만큼 이곳에는 많은 추억을 남기며 많은 사람의 만남의 장소가 됐다. 하지만 이런 이곳이 2013년 6월 말을 끝으로 장사를 마무리한다. 경영난과 맞물려 건물주가 바뀌면서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 한다는 것. 이 때문에 자리를 옮기거나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처해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들은 바로는 전주 삼양 다방이 2014년 6월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2013년 6월 세 들어 있던 건물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영업을 중단했던 삼양 다방은 새 건물주의 후원과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으로 옛 모습을 살려 최근 복원됐다. 다방에서 만났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신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풋풋한 20대에 자주 다니던 다방을 60이 되어 다시 찾아왔더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고 이보다 아름답고 감동을 자아내는 추억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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