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빛 박용운 Sep 26. 2022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

“Objective Time” and “Subjective Time”

  인생은 일장춘몽과 같다고 하더니 올해도 이미 아홉 달째 지나가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새해를 맞은 것 같은데 누가 우스갯소리로 20대에는 세월이 걸어가고, 30대에는 달려가고, 50대에는 날아가고, 60대 이후에는 축지법을 쓴다고 하더니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왜 사람들은 같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덧없음과 더불어 그 흐름이 점차 점차 빨라지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걸까. 고대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하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객관적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주관적 시간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바로 그것이다.    

 

  크로노스가 모든 사람에게 같이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사람마다 그 의미가 각각 다르게 느끼는 주관적 시간이다. 또 한 중세 기독교 신학의 건설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고백론(Confessisons)에서 시간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지만, 마음은 신적 시간 (카이로스)를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적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고 했다. 이 셋은 마음 즉 영혼 안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直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期待이다. 여기서 과거, 현재, 미래를 물리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현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세 시재가 단절되어 있지 않고 서로 하나로 연결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의 현재를 위해 현재 삶에 대한 가치와 책임을 느끼게 만든다.

               

  반대로 세 시재를 각각 독립적으로 보는 사람은 사라진 과거는 덧없이 허무하고, 닥쳐올 미래는 불안하므로, 오로지 현재의 무사안일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을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로만 여기는 사람들은 오늘도 무사히란 바람처럼 일상적으로 별 탈 없이 지내기를 기도한다. 자연히 이런 삶의 주된 관심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재해 달성 현황이란 간판을 보듯 소극적으로 매일매일 그냥 무사한 날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무사안일한 삶을 바라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숙명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무방비로 몸을 맡긴 채 일방적으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 대부분은 나이가 들면 세월의 덧없음과 그 흐름이 점차 빨라지는 것처럼 느낀다고 했다. 이것은 시간을 크로노스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이 때문에 불안한 미래보다 현실의 무사안일에 집착하게 되며 결국 힘든 일을 겪지 않아 몸은 비록 편할지 몰라도 마음은 이유 없는 불안과 초조로 고통을 받게 된다. 따라서 시간을 크로노스로만 받아들이면 죽음이란 주인 앞에 굴복하는 시간의 노예로 살기 쉽다.               

  은퇴 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다. 이런 삶은 노년의 남아도는 시간을 단순히 비생산적인 유휴시간으로만 보지 않고 카이로스로 만들어 보자는 의지를 내포한다. 시간을 카이로스로 바라보는 이들은 시간의 주인으로서 능동적으로 삶을 영위하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단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매 순간 나름대로 의미를 찾기 위해 힘쓰며 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 삶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어차피 ”인명은 재천“이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의 수명에 대해 모르긴 매한가지로 본다.               

  기대 평균수명 따윈 사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지 개체적으로 보면 수면이 각각 천차만별 아닌가. 개인의 수면이 어디에 속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시간을 카이로스 적으로 여긴다는 것은 남은 수명을 계산하고 있는 것보다 얼마가 남아 있건 간에 항상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세월이 빨리 지나감을 한탄하지 말고 남은 시간에 구애받지 말며 오늘 뜻을 세워 현재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어차피 누구나 할 것 없이 후회하기 마련이다. 다만 자신의 시간을 카이로스 써 능동적으로 보낸다면 임종 시 적어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자기만족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저 산은 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