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994년, 여름

by 홍윤표

여기서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여름이 시작할 즈음이었다. 정동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에릭 로메르 특별전」을 개최했고, 그날은 <해변의 폴린>이 상영 중이었다. 그녀는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영화가 끝날 때쯤에 눈물을 훔쳤다. 그리 슬픈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눈물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두 번째로 그녀를 만난 건 덕수궁 근처에 있는 미술관에서였다. 그곳에선 「근현대 미국 여성 작가전」이 개최되고 있었고, 그녀는 샐리 스왓랜드의 <바다와 소녀>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서도 눈물을 훔쳤다.

그녀에게 말을 건 건 세 번째 만났을 때였다. 안국역 근처의 좁은 골목길에서 혼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을 때, 그녀가 다가와 불을 빌렸다. 라이터에는 모네의 <해돋이>가 조악하게 인쇄돼 있었다. 그녀는 그 그림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바다를 좋아하시나 봐요."

나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네, 고향에선 볼 수 없는 거라서요."

그녀의 첫마디였다. 그녀의 고향은 2450년이라고 했다. 그녀는 시간 표류자였다.

"제가 바다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극장과 미술관에서 그녀를 본 걸 말해줬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눈물 흘리는 걸 봤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먼저 말했다.

"우는 것도 보셨겠네요."

그녀는 바다를 보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냥 눈물이 나네요."

"표류자이시면 이동제한 때문에 바다를 직접 보러 가시진 못하겠군요."

"네, 이왕이면 바닷가에 불시착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녀는 웃으면 콧등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게 됐어요?"

"기기 결함이요. 다들 그렇듯이요. 원래는 1994년 여름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길이 많이 어긋났네요."

"네. 한 번밖에 못 하는 여행을 이렇게 망쳐버렸네요."

우리는 잠시 말없이 불붙은 담배 끝을 바라보았다.

"1994년에 뭐가 있나요?"

"아뇨. 특별한 건 없을 거예요. 그냥 한번 보고 싶었어요."

"뭐가요?"

너무 질문이 많은 건 아닌지 막 후회하기 시작할 때, 그녀가 매고 있던 미치코런던 가방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지금의 유행과는 맞지 않은 저 가방은 아마도 1994년으로 가기 위해 여행사에서 준비해 준 물건일 것이다.

"이거 때문이요."

그녀는 종이를 펼쳐 보였다. 바닷가에 앉아 있는 남녀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본 수채화였다. 열심히 그린 것 같지만 솜씨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바다군요."

"네. 1994년의 여름 바다를 그린 그림이에요."

그림 오른쪽 하단에 '1994. 8. 21. 보성 율포솔밭'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가 그린 거예요?"

"아마 말씀드려도 모르실 거예요."

그녀는 누가 볼까 봐 재빨리 그림을 돌돌 말아 도로 가방에 넣었다.

"다른 시간대에서 가져온 물건을 함부로 꺼내는 건 불법이니까요."

"1994년이라……."

"네. 1994년이요."

그녀는 그때까지 불만 붙인 채 손가락에 끼우기만 했던 담배를 한 모금 빨았고, 심하게 기침했다. 그녀는 담배를 처음 피워본다고 했다. 고향에선 담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고 했다. 금기된 것에 도전해 보는 것. 담배는 그녀가 여행하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라고 했다.

"여기서 체류하는 동안 처음 피워봤는데, 여기 사람들은 이런 게 왜 좋다고 못 끊는지 이해가 안 돼요."

사실은 나도 담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아직까지 담배 맛을 이해 못 한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기침을 해대다 웃었고 돌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불 고마웠다고 말하고 떠나려는 그녀에게 라이터를 선물로 줬다. 그녀는 웃으며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간 뒤에도 콧등의 주름이 계속 생각났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종로의 씨네큐브에서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를 재개봉하던 날이었다. 이번엔 상영관 안이 아니라 매표소 앞에서였다.

"또 우셨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 영화에서 바다가 참 예쁘게 나오잖아요."

우린 극장 옆에 있는 작은 카페로 갔다.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고, 나도 같은 걸 주문했다.

"우연치곤 대단한 거 같아요. 벌써 네 번째라니."

"세 번까진 우연이지만 그다음부턴 인연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유치한 말을 뱉자마자 바로 후회했지만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여기 올 줄 아셨나 봐요?"

"네. 그냥 느낌이 들었어요."

우린 커피를 비우고, 극장 건물 뒤의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맞담배를 피웠다. 이번엔 그녀가 라이터를 빌려줬다. 저번에 줬던 그 라이터였다. 이번에도 우린 한 모금 빨고 기침을 해댔다.

그 뒤로 우린 종종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 다녔다. 그녀는 이곳에서 체류하는 동안 전통차와 커피를 배웠고, 에릭 로메르의 여름 영화들을 봤다고 했다. 메리 커셋과 샐리 스왓랜드의 그림 속 아이들은 애틋했고, 임군홍의 가족화는 슬펐다고 했다. 난 종로의 오래된 거리 구석에 있는 DVD 판매점에서 <첫 키스만 50번째>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DVD를 사줬고, 북촌의 조그만 카페에 마주 앉아 영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걷는 걸 좋아했다. 그녀의 고향은 산책하기에 마땅치 않은 곳이다. 우린 안국역에서 덕성여고를 지나 정독도서관으로 가는 길을 종종 걷곤 했다. 안국역에서 그녀를 기다릴 때면 역 앞에 있는 꽃집에서 장미 한 송이를 사 들고 그녀가 오면 건네주었다. 그녀는 매번 꽃을 받을 때마다 향기를 맡고, 그리고 날 보고 웃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콧등에 잡히는 작은 주름이 보기 좋았다. "여기선 서로에게 꽃을 주는 게 인사인가 봐요"라고 그녀가 물었고, 난 "글쎄요. 아닐걸요."라고 대답했다.

우린 정독도서관의 조그만 분수대 앞에 앉아 햇살을 잔뜩 머금은 여름 공기를 한껏 들이켰고,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오면 시원한 자료실에 들어가 빽빽하게 늘어선 서가 사이에서 오래된 책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거닐었다. 그러다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을 꺼내 그 자리에서 읽곤 했다. 그녀는 어차피 여기서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게 될지 모르니까 긴 책은 선뜻 읽지 못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그녀는 주로 어린이 열람실에서 그림책을 꺼내 봤다. 그녀는 특히 백희나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알사탕>을 제일 좋아했다.

"전 이 부분이 제일 좋아요. 아이가 아빠의 마음속 목소리를 듣고 뒤에서 꼭 껴안는 장면."

신기한 알사탕을 먹고 평소에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을 듣게 된 아이는 맨날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아빠의 속마음을 듣게 되는데, 그 속마음이란 '사랑해'이다.

"이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 한 가지를 꼽으라면 전 이 걸 꼽을 거예요. 사랑해."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고 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도 여름의 뜨거운 열기 탓에 얼굴이 조금 상기됐다.


그녀는 2450년에서 1994년 여름으로 가는 도중에 2025년 종로에 불시착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당시로선 이미 오래전에 상용화된 시간이동장치가 부분적인 기기결함을 일으켰고, 그 결함은 다수의 여행자를 2025년에 불시착하게 했다. 장소는 제각각이었다. 미래의 정부는 여행자들이 어느 시대에 불시착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알았으면 진작에 구조대를 보냈을 테니까. 현 정부의 시간 표류자 처리 방침에 따라 그녀는 불시착한 곳 인근의 세 지역구 안에서만 임시 체류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체류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갔고, 시에서 마련해 준 긴급지원 임시거처에서 지냈다. 스프링이 내려앉은 낡은 침대와 냉장칸만 있는 작은 냉장고, 공동 화장실 겸 샤워실이 복도에 있는 조그만 원룸텔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래도 종로에 불시착한 게 다행인 거 같아요. 서울에는 그래도 이것저것 볼 게 많잖아요. 바다는 없지만……."

경회루 연못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편의점에서 산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그런가요. 하긴, 영화나 그림으로나마 바다를 볼 수 있으니깐요."

나도 사탕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2450년엔 바다를 볼 수 없죠?"

"네. 바닷속에만 있으니까 바다를 볼 수 없어요."

그녀는 바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육지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녀의 말 따라, 바닷속에서는 바다의 풍경을 볼 수 없다.

"영상자료가 남아있잖아요."

"네. 그래도 영화나 그림으로 바다를 보는 게 더 좋아요."

그녀는 2450년에는 영화나 그림이 없다고 말했고, 난 그게 육지가 없어졌다는 말보다 더 슬프게 들렸다.

"인류는 생존에 꼭 필요한 정보와 기술만을 우선하게 됐죠. 제가 가지고 있는 그 바다 그림이 아마 유일한 그림일 거예요."

"그 그림은 어디서 얻은 거예요? 분명 귀한 걸 텐데."

"글쎄요. 저랑 그림이 인연이었나 보죠."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기기결함으로 시간 여행에 실패한 표류자들의 처리에 고심하던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타임캡슐이었다. 실패한 시간 여행자들이 불시착 한 시간대를 알지 못하는 미래의 정부에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정부는 임시체류 중인 표류자들의 정보를 디스크에 담아 타임캡슐에 넣고 보관하기로 했다. 후대에 계속 인계될 그 타임캡슐 속의 정보를 통해 미래의 정부는 자신들의 국민이 체류 중인 시간대를 알게 될 것이고, 데리러 올 것이다. 그녀의 송환이 결정됐다.


송환 전 날, 우린 인사동의 조그만 찻집에서 만났다.

"표류자의 정보가 보관된다면, 애초에 표류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뜨거운 국화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다봤다.

"그러게요."

나는 그녀의 손안에 들은 찻잔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시간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저 대신 물 좀 줄래요?"

그녀가 옆 의자에 올려놨던 장미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다음날 표류자들은 모두 송환됐다.


그녀가 떠난 뒤로 한동안 혼자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 가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에릭 로메르 특별전」과「근현대 미국 여성 작가전」은 모두 끝났고,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없는 종로 거리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려다 라이터가 없는 걸 깨달았다. 슬슬 담배를 끊을 때가 됐다.

호텔로 돌아와 짐을 싸고 장치를 켰다. 여행은 한 사람당 한 번만 허용된다. 당연히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여행지를 도중에 바꾸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와 영화를 보고, 그림을 보고, 걷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 그리고 지금은 바다가 궁금해졌다. 영화나 그림이 아닌 진짜 바다.

계기판 숫자를 1994년 8월 21일로 맞추고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 1994년의 여름 바다가 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그림 속에 있던 바다였다. 그녀가 죽기 전 꼭 한 번 보고 싶어 했던 그 바다였다.

얌전한 파도를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해풍은 시원했다. 파도가 발밑의 모래를 한 움큼씩 쥐어 갔다. 분명 그녀가 있던 2450년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고, 내가 있던 2452년에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녀는 고향으로 송환되고 얼마 후 날 만날 것이다. 그때 그녀가 날 기억할까? 날 기억했을까? 내가 2452년으로 돌아가면 뭔가가 달라져 있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는 거기 없을 거다.

늦여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한쪽에선 방학을 맞아 놀러 온 듯한 학생들이 까르르 거리며 서로를 물에 빠트리고 있었다. 모든 게 싱그러웠다. 올해의 여름은 곧 끝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많은 여름이 남아 있다. 난 나의 마지막 여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다. 파도에서 저만치 떨어져 모래에 털썩 앉았다. 뜨거운 태양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눈이 부셨다. 손으로 햇빛을 가리는데 누가 챙모자를 씌워줬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웃으며 내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게 바라보는 난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았다.

"연수 씨, 역시 여기 있었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조금 말랐다. 이미 발병한 후인가 보다.

"기기결함이 있던 사람들 보상해 준다고 특별히 한 번 더 여행이 허용됐어."

"그럼……."

"응, 고향에 돌아가고 연수 씨를 한 번에 알아봤지. 연수 씨는 날 몰랐지만."

우리의 첫 만남 그러니까, 2450년의 그날을 기억했다. 길을 가던 내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날 알고 있었나 보다.

"내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어?"

"그냥 느낌이 들었어."

그녀가 웃었다. 콧등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우린 나란히 앉아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번에는 눈물을 훔치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에 있지만, 저 바다는 현재다. 우린 우리의 시간에 바다가 충분히 스며들 수 있도록 그렇게 계속 앉아있었다.

"이거 가지실래요?"

까까머리 학생이 다가와 종이를 내밀었다. 그림이었다.

"방학숙제로 그린 건 데 실패한 거 같아서요. 그냥 버리긴 아까워서……."

학생이 내민 그림은 바닷가에 앉아 있는 남녀를 멀리서 바라본 수채화였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 '1994. 8. 21. 보성 율포솔밭'이라고 적혀 있었다.

"허락도 안 받고 그려서 죄송해요."

학생은 그림을 주고 친구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우린 그림을 보고, 서로를 보고 웃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우리가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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