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소설] 녹차와 맥주

by 홍윤표

금요일 퇴근 후, 세 살 배기 아들과 쇼핑을 하다 뽀로로 전화기 장난감 앞에서 발을 뗄 줄 모르는 녀석 때문에 구매 목록에도 없는 품목을 추가했다. 역시나 집에 오자마자 아내에게 구박을 들었지만,
저녁 내내 뽀로로 목소리와 '여보떼여' 라며 통화하는 아들을 보며 자신을 위로했다.
아내와 아들이 잠든 늦은 밤, 부엌 식탁에서 작은 형광등만 켜놓은 채 혼자 맥주캔을 깠다. 어두운 거실과 안방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내와 아들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거실 구석 어디선가 낯선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잠든 식구들이 깰까 봐 조용하면서도 서둘러 벨소리를 찾아 거실을 뒤졌다. 장난감 상자 안에서 들리는 것 같아 상자를 들여다보니 아까 낮에 사준 뽀로로 전화기가 울고 있었다.
서둘러 전원을 껐지만 벨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버튼을 이것저것 만지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놀랍게도 벨소리가 멈추고 '여보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친숙한 목소리. 상대는 다시 날 불렀고, 그것은 분명 뽀로로의 목소리였다.
뽀로로는 다시 나를 불렀고, 난 어처구니없게도 장난감 전화기에 대고 말을 했다.
뽀로로는 내 목소리를 듣고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이 시간에는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어 걱정했다고, 그러면서 지금 밖에서 혼자 추위에 떨고 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집에서 잠깐 몸 좀 녹일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난 엉겁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추위에 떠는 뽀로로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난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고 문 앞에는 2등신의 뽀로로가 몸을 떨며 서있었다.
난 얼른 뽀로로를 식탁 의자에 앉히고(2등신이라 살며시 들어 의자에 앉혀주어야 했다)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뽀로로는 고맙다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마실 것을 권하자 따뜻한 차 한 잔을 정중하게 부탁했고, 찬장에서 아내가 즐겨 마시는 녹차를 꺼내 타 주었다.
따뜻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뽀로로는 이제 몸이 좀 녹는다며 웃었고 나도 같이 웃었다.
뽀로로는 크롱이 마중 나오기로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많이 늦는다고 했다고 말했다. 난 연락이 올 때까지 여기 있어도 좋다고 말했고 뽀로로는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맥주와 녹차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뽀로로는 최근 인기 있는 티니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예전만 못한 자신의 인기를 씁쓸해했다. 가판대에서도 구석으로 밀렸다며 먼 곳을 바라보는 뽀로로의 눈빛은 티브이에서 보던 장난기 있는 눈이 아니었다. 나도 똘똘한 후배들에게 치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점점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다며 넋두리했고, 뽀로로는 내 말에 깊이 공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베란다를 통해 푸른 새벽빛이 거실을 채울 무렵, 뽀로로의 전화기가 울렸고(아들에게 사준 장난감보다 조금 작고 더 정밀해 보였다) 크롱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난 뽀로로를 의자에서 내려 주었고, 뽀로로는 덕분에 잘 쉬었다 간다며 깊은 배꼽인사를 했다.
뽀로로가 떠난 후, 난 맥주캔을 하나 더 꺼내서 마셨다.
안방에선 아직 아내와 아들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날은 조금씩 밝아왔고, 난 아내 옆에 누워 늦은 잠을 청했다.
그 후로 뽀로로 전화기는 다시 울리지 않았고, 아들은 일주일 후 전화기에 싫증을 내고 더 이상 갖고 놀지 않았다.
난 전화기를 버리지 않고 서랍에 넣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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