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한 권의 책이었다. 정승민 작가님의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 일곱 살 딸과 아빠 단 둘이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라는 지방에서 열흘간 머물며 지낸 소소한 일상이 빼곡히 담긴 책이다. 이탈리아 여행이라고 하면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시칠리아 정도만 알았지 풀리아라는 지역은 처음 들어보았다. 하지만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여행지보다는 여행방식이었다. 휴양지도 아닌 무려 유럽까지 가서 관광지를 돌기보다는 마치 제주도 한 달 살기처럼 느긋하게 지내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론 유럽 여행을 가면 왠지 유명한 관광지와 맛있는 맛집을 열심히 다니고 사진도 많이 남겨야만 할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선입견을 기분 좋게 날려주었다.
워낙에 물놀이를 좋아하는 딸 유라 덕분에 꼭 수영을 할 수 있는 여행지를 택해왔고, 그렇게 가게 된 베트남이나 오키나와에서도 관광보다는 물놀이 위주의 일정을 보냈었다. 그래서인지 유럽에서도 물놀이를 하며 느긋하게 지내는 책 속의 여행방식에 이끌렸다. 그래, 언젠가는 꼭 가보자. 그렇게 다짐한 게 작년 여름 무렵이었다.
그렇게 일 년 여의 시간이 흘렀다. 올여름 짧은 휴직을 시작하게 되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좀 생겼고, 그러자 오랜 다짐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언제 또 유럽여행을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쓸데없는 위기감과(실제로 10년 전 프랑스 신혼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여행이었다) 오랜 시간 묵혀두며 어느새 머리 한 구석에 박혀버린 이탈리아에 대한 로망이라는 두 상념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가슴을 살살 긁어댔다. 그래, 가보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유럽 여행에 그리 큰 결심이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와 함께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게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나 유난히 걷거나 야외활동을 싫어하고, 휴가는 곧 물놀이인 줄로만 아는 유라의 성향 때문에 유럽 여행은 결코 쉬운 휴가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에 가서도 꼭 걷고 보고 먹는 여행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이탈리아에 가서도 충분히 느긋하고 여유로운 휴양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정승민 작가님의 책을 보며 충분히 그런 여행도 가능하다는 걸 보았기에 이탈리아 여행을 조심스레 결심했다.
비록 휴직하는 덕분에 월급은 반토막이 났지만 그 대신 시간은 배 이상 늘었다. 돈은 지금이 아니어도 벌 수 있지만 시간은 지금이 아니면 벌 수 없다. '지금'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다소 색 바랜 교훈이 '지금'만큼은 빛을 발했다. 그동안 조금씩 모아뒀던 돈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모으자 어찌어찌 예산은 세울 수 있었다.
어느새 노트북 마우스 커서는 로마행 비행기표 예약버튼 주변을 어슬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