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탈리아 출발.
그나마 비행기삯이 싼 에어차이나 베이징 경유 편을 탔다. 맨날 저가 항공사만 이용하다가 나름 아시아에서 5번째로 큰 항공사를 이용하다 보니 생각보다 편했다. 앞 좌석과의 간격도 생각보다 넓었고(짧은 다리가 이때만은 축복이다. 키가 큰 뒷자리의 외국인 남성은 비행시간 내내 통로에 서있다 앉기를 반복했다). 끼니마다 기내식을 줬다. 물론 중국식 음식이라 입에는 잘 맞지 않았지만, 난 기내에서 받는 이런 소소한 서비스들이 좋더라. 딸 유라는 예약할 때 특별기내식으로 키즈밀을 주문해 놨는데, 좌석에 앉자 승무원이 "Special meal?"이라고 물어보았다. 아이가 뭐냐고 물어봐서 장난으로 "유라가 스페셜 키즈라 스페셜 밀로 주문했어."라고 말해줬다. 말하고 보니 마음에 들어 여행 내내 스페셜 키즈라고 불렀다.
베이징에서 경유할 때 해프닝이 생겼다. 한 시간 동안 베이징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가 휴대전화가 없어졌다고 했다. 갑자기 패닉에 빠진 우린 자리를 이리저리 뒤지다가 공항 화장실에서 놓고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급해진 나는 아내에게 빨리 다시 가서 찾아오라고 했고 아내가 비행기 출입구 쪽으로 갔다가 힘없이 돌아왔다. 이제 곧 이륙해야 하니 나가지 못한다고 했다더라. 난 갑자기 짜증이 일었다. 현지에서 자동차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아내와 내가 각자의 휴대전화로 길도 찾고 계산도 하고 인터넷 검색도 해야 수월할 거라 생각해 만반의 준비를 한 터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휴대전화 하나가 없어지다니...... 더구나 아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딸 유라의 사진이 한꺼번에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더 짜증이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잘 좀 챙기지 그랬냐고 성질을 부리고 짜증을 냈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찾았다!"며 어디선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알고 보니 아내와 유라 좌석 사이에 휴대전화가 빠져있던 것이다. 휴대전화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힘이 턱 빠졌다. 그리고 괜히 아내에게 화낸 게 미안했다. 생각해 보면 아내가 일부러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정작 잃어버린 당사자가 더 답답했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아내를 위로하진 못할 망정 옆에서 윽박지르기나 하다니...... 하지만 아내도 아내 나름대로 나에게 화가 난 상태. 쉽게 사과를 못하는 내 소심한 성격 탓에 12시간의 로마행 비행기 분위기가 영 서먹했다. 결국 난 아내의 눈치를 보며 괜히 가운데에 앉은 유라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승무원이 지나갈 때마다 "뭐 마실래?"라고 실없이 물어보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좋아지지 않았다.
여행을 하면 종종 여행 동반자와 사이가 틀어질 때가 있다. 그게 친구든 가족이든 상관없다. 여행 일정 내내 붙어 다녀야 하는데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혹은 신경 쓰이지 않던 것들이 낯선 타지에서 오랜 시간 붙어있다 보면 눈에 거슬리게 마련이다. 여행 스타일, 음식 취향 등등. 그런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여행 말미에 틀어지는 경우도 있다.
동남아나 일본같이 가까운 곳을 여행할 때는 편한 마음으로 다녔는데,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많이 받았나 보다.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아내의 실수를 보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일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유럽에서 느긋하게 지내기 위해 이번 여행을 계획했는데, 준비하는 과정부터가 느긋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야, 캄다운 캄다운. 다시 여행의 초심을 되새기자. 로마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다짐했다.
다짐하면서 어느새 잠들었을까. 깨어보니 좌석 스크린 안에서 로마가 눈앞에 있었다.
이렇게 우린 로마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