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두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바리 공항에서 내려 무사히 도착했다. 열두 시간 넘게 비행을 해서 그런지 두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짐을 찾고 렌터카 사무실로 갔다. 공항 한쪽에 여러 렌터카 업체 사무실들이 모여 있었다. 업체마다 대기줄이 정말 길었는데 다행히 허츠 골든멤버로 등록한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접수할 수 있었다. 유럽 렌터카를 할 때 조심해야 하는 몇 가지를 미리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비스인 척 차량 업그레이드를 시켜준다거나 이미 보험을 들었는데 다른 보험들을 권유한다는 거였다. 특히나 영어가 서툰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그들의 영어에 그냥 예스만 하다가 눈뜨고 코베인 다고. 다행히 나를 상대한 직원은 한 가지만 빼고 예약서대로 진행해 줬는데, 노 엑스트라 차지로 큰 차로 업그레이드 해주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길이 유난히 좁으니 웬만하면 작은 차를 빌리라는 정보를 본 터라 오히려 더 작은 차는 없냐고 물어보고 결국 소형 SUV인 피아트 600을 빌렸다.
렌터카가 있는 주차장까지 걸어갔는데, 여행 준비를 하며 찾아본 '텐트 밖은 유럽-로맨틱 이탈리아'에서 봤던 그 길이었다. 덕분에 크게 헤매지 않고 비교적 쉽게 허츠 주차장까지 가서 차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작은 차를 빌렸던 걸까. 트렁크에 18인치 기내용과 20인지 중간 사이즈 여행가방을 넣으니 문이 안 닫혔다.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해 결국 테트리스로 겨우 각을 맞춰 어찌어찌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첫 숙소가 바리 공항에서도 2시간이나 더 내려가야 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저녁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 가는 길에 장을 봐서 숙소에서 간단히 저녁을 때우기로 했다. 아내가 공항 근처에서 가장 큰 마트를 검색해서 그리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마트에 주차하고 차 문을 잠그려는데 계속 잠기지 않았다. 일단 아내와 딸 유라는 마트로 들어가고 나 혼자 차를 살펴보기로 했다. 하지만 차 문을 잠그려고 이리저리 애써봐도 소용없었고 오히려 차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더 이상하고 수상해 보일 거 같아 그냥 차 안에 앉아 있기로 했다. 혹시 차 문이 안 잠긴 걸 알고 도둑질하려고 날 주시하는 건 아닐까. 내가 자리 비우기만 기다리는 건 아닐까. 본격적인 여행 첫날이라 잔뜩 긴장하고 경계심도 풀차지된 상태였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괜히 눈 마주치는 외국인이 있으면 불안했다(하지만 정작 그들은 나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차 안에서 앉아 있으려니 점점 더워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아까 트렁크가 잘 안 닫혔던 게 생각났다. 트렁크가 제대로 안 닫혀서 문이 안 잠기는 건가? 혹시나 싶어 가방을 다시 정리하고 트렁크 문을 닫고 잠금버튼을 누르자 문제없이 차가 잠겼다. 야호. 쾌재를 부르며 당당하게 아내와 유라가 있는 마트로 들어갔다.
처음 접하는 이탈리아 마트는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과자 종류가 우리보다 훨씬 적고(감자 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와인 종류가 우리나라 대형 마트보다 훨씬 많았다. 아내가 와인 라벨에 DOCG 표기가 붙은 게 이탈리아 정부 인증 표식이라는 걸 들었다며 알려줬다. 와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우리 부부는 일단 DOCG 표기가 붙은 와인을 사기로 했는데, 그것도 종료가 엄청 많았다. 결국 진열대에 빈자리가 가장 많은 와인을 골랐다. 빈자리가 많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사갔다는 걸 테지 내리 짐작하면서.
과자와 과일, 빵 등을 꾸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많이 피곤했는지 유라는 바로 곯아떨어졌고 아내는 옆 자리에서 길을 봐주었다. 첫 장거리 운전이라 조금 긴장했는데 시내 운전이 아니고 국도만 죽 따라 내려가면 돼서 의외로 쉬웠다. 안드로이드 오토로 구글 내비를 켜고 멜론으로 kpop을 들으면서 가니 우리나라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있었는데, 바로 날씨였다. 하늘이 어둑해지더나 갑자기 미친 듯이 빗방울이 차에 내리 꽂혔다. 그냥 비가 아니라 우박같이 엄청 굵은 빗방울이었는데 앞유리에 떨어질 때마다 누가 위에서 물풍선을 던지는 것 같았다. 유리 깨지는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물폭탄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진짜 폭탄이 터지 듯이 내리꽂는구나. 가다 보니 다른 차들은 비가 멎을 때까지 교각이나 고가도로 밑에서 정차해서 잠시 쉬고 있었다. 하지만 갈길이 급한 우리는 그냥 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10년 전 프랑스에서도 이처럼 큰 비가 내려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유럽 비는 다 이렇게 굵은 걸까. 다행히 와이프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고 길도 봐줘서 무사히 숙소까지 갈 수 있었다. 숙소 근처인 도시인 레체에 근접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뒤를 돌아보니 시커멓고 거대한 먹구름이 우리가 가는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바리의 첫인사는 이렇게 요란법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