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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by 홍윤표
카메라: MINOLTA HI-MATIC AF-D / 필름: Kodak Ultramax 400 / 일자: 25.10.15.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으면 이사하는 집을 종종 보게 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사를 꽤 했는데요.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집안 경제사정에 따라 이사를 다녔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회사 다니셨을 때는 회사 근처로 옮겨 다녔고,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시게 되고 경제 사정이 안 좋았을 때는 평수가 작은 집으로 옮겨 다녔었죠.

어머니가 무척 고생하셨을 거예요. 사실 아버지는 그리 가정적이지 않으셨거든요.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 다니셨는데 매일 술자리의 연속으로 새벽에 들어오셔서 새벽에 나가셨더랬죠. 어렸을 적 안방에 걸린 매끈한 아버지 양복에서 항상 희미하게 술냄새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덕분에 이사는 항상 어머니의 몫이었죠. 세간살림 정리부터 청소까지. 어리고 철없던 우리 형제는 별도움이 안 됐습니다.

적잖은 이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처음으로 분양받아서 새 아파트로 가던 날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마침 시험이 끝나는 날이라 오전에 학교를 마치고 만화책을 잔뜩 빌려서 새 집으로 갔었지요. 한창 이사 중인 어수선한 집 한 구석에서 열심히 만화책만 읽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무슨 만화책을 봤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어머니의 웃는 얼굴은 기억에 남아요. 결혼하시고 15년 넘게 오래되고 작은 집에서만 세 들어 사시다가 처음으로 새 아파트의 우리 집을 얻어서 무척 좋으셨을 겁니다. 그때는 그런 사정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셨을 것 같아요. 가구도 새로 장만했는데 이사가 끝나고 늦은 저녁까지 물걸레로 가구를 박박 닦으시던 모습도 기억나네요.

아무튼 저희는 그 집에서 6년을 살고 나왔습니다. 아버지 일이 잘 안 풀려서 다시 작은 집으로 세 들어가야 했거든요. 그리고 곧바로 전 군대에 갔고요. 그즈음 우리 집 경제는 어머니가 도맡으셨어요. 동대문에서 옷을 떼어다가 소매로 여기저기 발품을 파셨는데, 제대하고 듣기로 경기도 안양에서 천안 너머까지 매일 다니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 어머니는 혼자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계십니다. 저희 집이랑 멀지 않아서 종종 뵙고 있어요.

가끔 오래전 그 아파트 앞을 지나는데요. 그때는 새 아파트였는데 지금은 아주 낡은 아파트가 되었더라고요. 그래도 저한테는 항상 새집 냄새나는 새 아파트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곳 101동 1403호에 가면 행복했던 그 시절의 우리 가족이 아직 살고 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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