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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by 홍윤표
카메라: MINOLTA HI-MATIC AF-D / 필름: Kodak Ultramax 400 / 일자: 미상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에 조그만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미끄럼틀이나 그네는 안전상 이유로 철거됐고 그냥 모래밭만 있었어요. 그래도 친구들과 전 매일 하교하면 거기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놀이터에서 재밌고 효율적으로 놀기 위해 우린 항상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야 했어요. 놀이의 규칙을 정해놓으면 반드시 그걸 지켜야만 합니다. 중간에 다른 친구가 합류하면 열심히 규칙 설명을 해주고 같이 놀았죠. 어설픈 규칙 덕분에 우린 종종 싸우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규칙을 보강해 나아갔습니다. 그 과정도 무척 재밌던 기억이 나네요.

더 어렸을 땐 형과 형 친구들이 놀 때 같이 끼어서 놀기도 했습니다. 형들은 어린 절 따돌리지 않고 깍두기로 쳐줬죠. 같이 놀되 규칙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좀 못해도 봐주는 그런 깍두기 말이에요. 요새 아이들 사이에도 그런 게 있나 모르겠네요. 아무튼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어두워서 안 보일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놀았어요. 그때 놀이터는 우리만의 규칙과 신념으로 움직이는 우리만의 세상이 됩니다.

지금 저의 세상은 그때보다 더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커졌다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깍두기는 허용되지 않고, 규칙을 모르거나 지키지 못하면 금방 도태되죠. 새로 합류한 사람에게 규칙을 열심히 설명해 주는 친절한 사람을 찾기도 드뭅니다. 잘못된 규칙을 보강해 가며 더 단단히 만드는 데에도 많은 갈등과 다툼이 뒤따르죠. 심지어 누군가에게만 유리한 규칙이 돼버리기도 하고요.

제가 사는 세상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전 그때의 놀이터를 생각합니다. 온전히 우리들만을 위해 존재했던 세상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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