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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

by 홍윤표
251024361643090022.jpg 카메라: MINOLTA HI-MATIC AF-D / 필름: Kodak Ultramax 400 / 일자: 미상

집 앞 산책길에 벤치가 늘어서 있습니다. 오전과 낮 시간에는 보통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시고 하교 시간에는 가끔 학생들이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합니다. 저녁에는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의 반려견들을 소개하는 개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죠.

얼핏 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죠. 벤치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꽤 오래됐을 것 같네요. 무수한 시간과 무수한 사람이 벤치의 표면을 무수히 쓸며 지나갔을 걸 생각하면 아득해집니다.

시간에는 형태가 없다고들 하지만 굳이 상상해 보자면, 분명 뾰족한 모양은 아닐 겁니다. 뭉툭하고 무뎌진 무언가를 상상하게 돼요.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다는 표현만 봐도 그렇죠. 묵직하고 무거운 뭔가가 머리 위에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시간이 스쳐 지나가면 깊이 파이는 게 아니라 서서히 무뎌지나 봅니다.

무심히 흐르는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벤치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시간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곁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는 거죠. 잠시 머물다 속절없이 날아가는 낙엽들을 그저 놔줄 수밖에 없습니다.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가을 끝자락에 아무도 없는 벤치를 보니 괜스레 가슴 한쪽이 시리네요. 저도 저 벤치처럼 많은 것들을, 많은 이들을 잠시만 곁에 품었다 보냈습니다. 그것들이, 그들이 남긴 흔적만 남았고요. 아마 모두 마찬가지겠죠. 낙엽을 보고 쓸쓸해지는 걸 보니,

아마도 가을을 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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