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라에서 숙소로 돌아오니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우린 옷을 갈아입고 바로 숙소 수영장으로 뛰어갔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유라를 위해 어떻게 서든 1일 1수영을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해가 저물면 날씨가 은근히 추워지기에 오래 물속에 있진 못 했지만 그래도 유라와 함께 물속에서 인어 놀이(유라는 최근 인어에 흠뻑 빠졌다)를 하니 오전동안 쌓였던 여독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물놀이를 마치고 오늘 입은 옷과 수영복을 가지고 세탁실에 가니 또 우리 양말이 세탁기 위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오늘 세탁기를 돌리면서 내가 또 빠뜨렸나 보다. 뭐지, 세탁기가 양말을 숨겨놓기라도 하는 건가. 오늘은 반드시 세탁기를 싹싹 긁어 옷을 가져가도록 다짐 또 다짐한다.
세탁실에서 나오니 어김없이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따라온다. 아마도 이 녀석은 하루 종일 세탁실 근처에 숨어있다가 누가 세탁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타나서 주위를 맴도나 보다. 결국 객실까지 따라온 녀석은 방 안까지 들어와서 같이 놀자고 야옹거렸다.
저녁은 그저께 트룰리 마을 갔던 날 점심 먹으려고 도보로 가다가 포기했던 숙소 근처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차로 5분 정도 가서 식당 앞 골목에 주차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와 실외로 꾸며진 꽤 규모가 큰 식당이었는데 이미 자리가 거의 꽉 차있었다. 직원이 나와서 예약했냐고 물어봤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 식당은 종류에 따라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하는 곳이 있다고 읽은 기억이 났다. 예약 없이 무턱대고 온 걸 후회하며 예약은 안 했다고 대답하자 직원이 약간 곤란해하는 눈치로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잠시 후 좀 더 높아 보이는 아저씨가 나와서 괜찮으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며 우릴 안내했다. 조그만 정원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니 멋진 야외석이 나왔다. 우린 그곳에 자리를 잡고 찬찬히 메뉴를 훑어봤다. 이탈리아에 와서 피자를 아직 한 번도 안 먹은 우린 햄과 버섯이 올려진 피자와 감자튀김을 주문했고 유라는 역시나 오레끼에떼를 주문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파스타를 곧잘 먹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먹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오레끼에떼는 유라의 소울푸드가 되는 것인가. 차 때문에 술을 못 먹는 나를 대신해 아내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이때 직원이 비앙코 뭐라고 했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우린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직원이 가고 나서 검색해 보니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중 뭘 먹을 거냐고 물어본 거였다. 우리가 비앙코에서 끄덕거렸더니 역시나 화이트 와인이 나왔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맛이 꽤 좋다고 했다. 잘 못 시켰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음식을 먹고 있는데 우리가 시키지 않은 메뉴가 나왔다. 브루스케타처럼 바게트 빵 위에 방울토마토가 올려져 있는 음식이었다. 뭐지, 우리가 주문할 때 실수라도 했나. 조심스럽게 직원에게 물어보니 걱정 말라며 가게에서 주는 거라고 안심시켰다. 와, 메뉴를 많이 시킨 것도 아닌데 서비스도 주네? 서비스라고 하기엔 너무 제대로 된 메뉴 음식인데? 아무튼 우린 조금 부족한 듯 시켰는데 잘 됐다며 맛있게 먹었다.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자리한 식당이라 그런지 지역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많이 오는 것 같았다. 특히 직원들과 손님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아는 척하는 걸 보니 단골들이 편하게 오는 분위기의 식당인 것 같았다. 이탈리아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가족을 엄청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역시나 대가족 단위의 가족 모임이 많이 보였다. 직원과 손님이 서로 웃으며 살갑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마치 친척 집에 한데 모여 있는 명절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책에서 보기로 이탈리아에서는 웬만하면 음식을 나눠 먹지 않고 한 명당 한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세 명이서 식당에 가면 파스타, 피자, 샐러드 정도를 주문해서 서로 앞접시에 덜어 먹곤 하는데, 여기선 피자든 파스타든 본인 음식은 본인만 먹는 것 같았다. 아내가 우리 뒷자리의 젊은 여성 둘이 온 테이블을 보며 놀라길래 물어보니, 여자 둘이 1인 1피자를 해서 한 판을 다 먹는 걸 보고 놀랐더라. 나도 제법 많이 먹는 편이지만 피자 한 판을 다 해치우지 못했는데......
이 식당은 음식도 매우 훌륭했지만 분위기도 무척 좋았다. 특히 직원들이 매우 친절했는데,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는 게 좋았다. 처음 보는 우리에게도 가벼운 장난을 치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음식을 다 먹고 일어나려니 지나가던 직원이 어깨를 감싸며 친구에게 인사하듯 맛 좋았냐고, 잘 가라고 인사를 던졌다. 처음엔 관광지가 아닌 지역의 로컬 식당이라 괜히 무시당하고 예약 안 했다고 문전박대당할까 걱정이었는데 정말 기분 좋은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 프랑스에서도 프로방스 지방의 이름 모를 소도시에서 숙소 추천을 받고 갔던 식당도 매우 친절했던 기억이 났다. 주인이 직접 나와서 우리 서로 프랑스어도, 한국어도, 영어도 모르니 커다란 메뉴 그림이 그려진 패널을 가져와서 주문을 도와줬던 기억이 난다. 확실히, 외국에서의 식당 경험은 맛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곳 직원들의 태도로 더 오래 기억되는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유라는 피곤했는지 양치를 하고 오전에 산 인형을 껴안고 곤히 잠들었다. 아내와 나는 트룰리 숙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객실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늦여름 밤을 만끽했다. 그러자 또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우리와 함께했다. 아까 식당에서 와인을 못 먹어 아쉬웠던 나는 숙소에 있던 와인을 꺼내 마셨다. 노곤한 피로감과 적당량의 알코올이 섞여 여름밤을 더 기분 좋게 만들어줬다.
내일은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폴리냐노 아 마레로 이동하는 날이다. 지난 여행의 좋은 추억과 앞으로 맞이할 여행의 기대감을 안고 늦은 밤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