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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여행] 계획에 없던 마을을 가보았다

by 홍윤표

숙소 안내 책자에 주변 맛집과 가볼 만한 주변 마을 소개가 있었다. 이 숙소에서 지내면서 가보기로 한 곳은 알베로벨로 트룰리 마을과 마테라였는데 마테라는 내일 가기로 한지라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오전에는 느긋하게 수영하면서 보내고 오후에는 안내 책자에 나온 주변 마을들에 가보기로 했다.

수영하기 전에 객실 앞 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쬐고 있는데 대학원생쯤으로 보이는 직원이 조식을 가져다주면서 어제 세탁실에 양말을 올려놨는데 봤냐고 물어봤다. 아, 이 직원이 챙겨놨구나. 아마 지금 묵고 있는 숙박객 중에서 우리만 세탁실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멋쩍게 웃었다.

아침을 먹고 유라와 나는 후딱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갔다. 역시나 오늘도 몇몇 팀이 벌써부터 와서 선베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작 물 안에는 우리만 들어가서 수영장을 전세 낸 것 같았다. 이 숙소에 아이는 유라뿐이라서 물놀이를 하는 가족이 없었다. 우리가 한참 물놀이를 하는데 아내가 에스프레소를 들고 선베드에 왔다. 애초에 일찍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우린 수영장에서 꽤 오랜 시간 놀았는데, 슬슬 배가 고파져서 물 밖으로 나오니 이미 12시였다. 아내가 조식으로 먹다가 남은 빵과 전에 마트에서 샀던 과자들을 좀 챙겨 와서 선베드에 누워 먹었다. 그런데 내가 조작을 잘못했는지 선베드 다리가 훽 접히면서 뒤로 기울었다. 깜짝 놀라며 엉거주춤 일어나서 다시 다리를 펴고 누웠는데 이번엔 더 심하게 접히면서 의자 머리 쪽이 아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뒤로 벌러덩 넘어진 나는 등이 너무 아팠지만 일단 일어나서 의자를 이리저리 만졌는데 조작이 쉽지 않았다. 그때 옆 자리에 있던 외국인 남성이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의자 펴는 걸 도와줬다. 고맙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빨개진 얼굴로 선베드에 어정쩡하게 누웠다. 또 뒤로 넘어질까 봐 몸에 힘을 주고 살짝만 누워있는데 옆에서 아내가 깔깔 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도 이 상황이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20250905_124204.jpg 몇 시간 만에 물에서 나와 선베드에 앉아 조촐한 점심을 먹었다.

선베드에서 간단한 주전부리로 점심을 때운 후 우린 수영장에서 나왔다. 안내 책자에서 본 첫 번째 마을은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Martina Franca라는 마을이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사이, 약 2시부터 5시까지는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길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 날도 어김없이 애매한 시간에 마을에 도착하니 골목이 조용했다. 구시가지로 가는 길에 조그만 바가 영업을 하고 있길래 아내와 나는 에스프레소, 유라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유라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 우리도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마셨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바에 팔을 걸쳐놓고 에스프레소를 두어 번 툴툴 털어먹고 나갔다. 가볍게 와서 몇 모금 털고 바로 나가는 모습을 보니 과연 이탈리아인들에게 커피는 일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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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이라 한산한 골목과 닫혀진 상점들

구시가지로 들어서자 그래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르신들이 단체관광 오셨는지 목에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조그만 스피커를 걸고 돌아다니셨다. 역시나 이 마을에도 광장 한가운데에 산 마르티노 대성당(Basilica di San Martino)이라는 성당이 있었는데 풀리아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건축이나 예술 쪽으론 문외한인 나는 이제껏 본 성당이 다 비슷해 보였는데 그래도 싫지 않았다. 서늘한 성당 안에서 잠시 쉬었다가 우린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Martina Franca에는 특별히 볼 만한 곳은 없었고 이탈리아 특유의 구시가지 골목길을 요리조리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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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이 없어 조용했던 산 마르티노 대성당

점심을 적게 먹었던 터라 슬슬 배가 고파진 우린 광장 주변 식당을 물색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영업 중인 식당 자체가 별로 없었는데 그래도 한 곳을 찾아 앉았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메뉴판도 갖다 주지 않는 거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손님들도 주문이 많이 늦어지는 눈치였다.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항상 별로 기다리지 않고 주문을 했고 음식도 바로 나왔는데 이곳은 너무 느렸다. 결국 좀 더 기다리다가 그냥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아서 결국 차를 타고 다른 마을로 이동해서 밥을 먹기로 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Locorotondo로 향했다. 방금 방문했던 Martina Franca보다 규모가 조금 더 커 보였는데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전망이 꽤 좋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슬슬 저녁시간이 시작될 즈음이라 문을 연 식당이 꽤 있었다. 우린 주차를 하고 언덕길을 올라가며 식당을 찾았다. 전망 좋은 곳이라 그런지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정작 식사가 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5시가 채 안된 시간이라 본격적인 식사보다는 가벼운 와인이나 칵테일 정도의 식전주만 가능한 곳이 많았다. 이게 바로 책에서 읽었던 아페리티보(Aperitivo)라는 건가 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본격적인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가벼운 칵테일과 핑거푸드를 즐기는 아페리티보 문화가 있다고 한다.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따로 식욕을 돋우는 시간을 마련하다니...... 역시 미식에 진심인 나라다웠다.

식사가 가능한 식당을 찾으면서 유라가 갑자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햇빛이 예뻐서 모든 사물이 긴 그림자를 만드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보고 생각을 한 건지 '그림자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만약에 그림자로 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해가 있을 때만 살 수 있고 밤이 되면 사라져.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다시 태어나는 거고. 어때?"

"오, 좋은데? 언젠가 이 아이디어로 짧은 이야기를 만들면 좋겠는걸."

우린 신나게 그림자 사람 이야기를 떠들며 식당을 찾다가 언덕 거의 끝에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이른 조식과 간단한 점심만 먹은 터라 배가 무척 고팠던 우리는 햄버거와 스테이크, 통감자 구이와 감자튀김, 리코타 치즈가 들어간 오레끼에떼를 주문했다. 고기와 감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 허겁지겁 먹었다. 유라도 이탈리아 와서 최애가 돼버린 오레끼에떼와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었다.

20250905_182858.jpg 로꼬로톤도에서 먹은 저녁. 이탈리아 식당에는 저렇게 QR코드로 주문을 할 수 있는 곳이 꽤 있어서 의외로 편리하다.

밥을 다 먹고 일어설 때쯤 해는 뉘엿뉘엿 떨어져 어느새 지평선에 맞닿아 있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풍경이 꽤 멋져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여행 책자에서 이 마을을 추천한 이유가 있었구나. 우린 멋진 노을을 감상하며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어느새 어스름이 골목 사이사이에 내려앉았다. 우린 예쁜 조명이 켜진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어둠을 만끽했다. 아까는 한산했던 골목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노상 테이블마다 가족, 연인, 친구들과 잔을 부딪히며 미소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성당과 교회가 있었는데 규모가 상당히 작았고, 실제로 마을 주민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안에 들어갔다가 예배에 방해가 될까 얼른 나와 다시 골목길을 돌았다. 일부러 안 가본 길을 빙빙 돌다가 어느 광장에 들어섰는데 한창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슨 공연을 하나 하고 공연시간이 될 때까지 벤치에 앉아 한참을 기다려봤는데, 공연은 아니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심포지엄 같은 느낌의 행사였다. 노래 공연을 기대했던 우리는 조금 실망하여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래도 어둠에 잠긴 도시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을, 심지어 이런 마을이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곳에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계획한 여행도 좋지만 이렇게 현지에서 발견하는 여행도 참 좋다. 덕분에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마을 하나를 가슴에 새기고 떠날 수 있었다.

20250905_191317.jpg 달과 해가 함께 떠있는 시간. 석양이 무지개처럼 펼쳐졌다.
20250905_190647.jpg 언덕 아래에는 조그만 포도밭과 와인 시음을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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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이 내려앉은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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