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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여행] 고대 도시 마테라에 가다

by 홍윤표

오늘은 마테라에 가기로 한 날이다. 여유롭고 무계획적인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래도 몇 군데는 가보자고 마음먹었던 곳이 두세 군데 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마테라다. 숙소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하는 거리라 조금 망설였지만 그래도 이번에 안 가면 평생 못 갈 것 같아서 일단 출발하기로 했다.

가늘 길이 대부분 1차선의 시골길이었는데 지평선까지 길게 늘어선 평야와 한가로이 풀 뜯어먹는 소와 말들이 눈에 띄었다. 한 시간의 짧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여기저기 자유롭게 있는 말들이 신기해서 유라도 많이 지루해하지 않았다.

가는 길에 아내가 마테라 근처의 인형 가게를 검색했다. 유라는 여행을 가면 항상 기념품으로 인형을 사는데 저번에 알베로벨로에서 샀던 하마 인형도 좋았지만, 좀 더 큰 매장에서 맘껏 고르게 하고 싶어서 큰 매장을 찾았다(그리고 마테라를 구경하려면 꽤 걸어야 할 것 같은데 걷는 걸 싫어하는 유라의 기분을 사전에 좋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유라에게 어디 가는지 비밀로 하고 장난감 매장에 갔더니 역시나 유라가 뛸 듯이 기뻐했다. 우리도 흡족해하며 매장을 둘러봤다. 규모가 상당히 컸는데 인형과 장난감뿐 아니라 학용품과 옷, 카시트, 유모차 등 다양한 영유아 제품을 종합적으로 파는 곳이었다. 인형 종류도 상당히 많았는데 유라가 고른 녀석은 멘토스 사탕을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고슴도치 인형이었다. 크기가 꽤 커서 내가 들어도 양 팔로 크게 안아야 겨우 들 수 있는 녀석이었다. 어쨌든 큰 인형 덕분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 유라를 데리고 차에 올라 마테라 구시가지로 향했다.

마테라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한다. 동굴을 파서 거주지와 교회를 만든 사씨 디 마테라(Sassi di Matera)의 절경이 유명한데, 19세기 후반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지로 쓰이다가 1950년대에 열악한 위생환경과 질병, 악독한 노동환경 등으로 거주자들을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관광지로 개발되고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된 곳이다. 고대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 독특한 도시 풍경 덕분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원더우먼>, <007 노타임 투 다이> 등 다양한 영화의 촬영장소로 쓰인 곳이다.

구시가지 외곽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본격적으로 마테라 구시가지에 들어서자마자 숨 막히는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행 책자에서 처음 마테라 전경을 보면 적잖은 시각적 충격을 받을 거라고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채도가 낮은 모래색의 작은 건물들이 빼곡히 박혀있는 모습은 이제까지 봐온 이탈리아의 어떤 마을과도 다른 곳이었다. 마치 아예 다른 나라, 다른 행성에 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우린 한동안 넋이 나가 절경을 구경하다가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마치 시간여행을 온 듯 과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마테라의 모습

미로처럼 얽힌 조그만 골목이 이리저리 뻗어 있고 중간중간 광장에는 식당과 기념품 숍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우린 처음 맞는 광장에서 에스프레소와 젤라토를 먹으며 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따스한 한낮의 햇살 아래 광장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 칵테일, 커피, 젤라토 등을 먹는 여유로운 풍경 속에 섞여 우리도 일부가 되었다.

골목을 지나면서 여기저기 마테라 전경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가 많았다. 우리는 마테라 두오모 대성당(Duomo di Matera)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여행 전에 찾아봤던 <텐트 밖은 유럽- 로맨틱 이탈리아>에서 출연진들이 이 성당 앞 광장에 올라가 전경을 보는 장면이 있었는데 무척 아름다웠던 기억이 나서 우리도 가보기로 했다. 길거리 표지판에 적인 성당 그림만 따라가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과연 광장에서 바라보니 마테라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우린 한참을 풍경을 바라보다 슬슬 배가 고파져 다시 밑으로 내려왔다.

마테라에는 크고 작은 광장이 여럿 있다.
골목을 지나다 보면 마테라 전경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가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
두오모 성당 앞 광장에서 바라본 풍경. 파노라마로 찍어 보았는데 그 웅장함을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었다.

두오모 성당에서 내려오며 식당이 모여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유라는 역시나 오레끼에떼를 먹겠다고 하여 파스타 메뉴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자리를 잡고 앉고 보니 구글 평점이 그리 높은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기 미안해서 그냥 먹기로 했는데, 맛이 꽤 괜찮았다. 역시 구글평점은 다 믿을 게 아니구나.

유라는 역시나 오레끼에떼를 먹고 아내는 해산물 파스타, 나는 소시지 구이와 감자구이를 먹었다. 이탈리아에서 먹은 대부분의 요리들처럼 별다른 소스를 첨가하지 않은 소시지와 감자 본연의 맛. 아내는 별로라고 했는데 난 맛있게 잘 먹었다. 베트남을 가면 처음 2~3일은 음식이 정말 맛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특유의 향 때문에 점점 질린다. 하지만 이탈리아 음식은 특유의 향이 없어서 그런지 질리지 않고 무난하게 잘 먹을 수 있었다. 이쯤 되니 한국에서 가져온 컵밥과 라면을 어떻게 다 소진하고 갈까 걱정되기 시작할 정도였다.

마테라 식당에서 먹은 점심식사. 소시지와 감자구이는 얼핏 보면 정말 성의 없어 보이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마테라 골목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다보면 도시 전경이 눈앞에 갑자기 펼쳐지곤 한다. 저런 좁은 동굴같은 골목 끝에도 멋진 풍광이 기다리고 있다.
식당과 기념품샵이 골목 사이마다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계산을 하려는데 종업원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는 알제리에서 왔단다. 그러면서 음식은 맛있었냐 등등 말을 걸어왔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면서 느낀 건 사람들이 참 친절하고 붙임성이 좋다는 거였다. 동양인이 잘 안 보이는 곳에 우리가 있으니 신기해서 물어보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냥 스몰토크 자체를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로마나 베네치아 등 대도시에서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겪었다는 글을 카페에서 종종 봤는데 아직까지 그런 경험을 겪지 못했다. 10년 전 프랑스 신혼여행 때도 느꼈는데 파리나 마르세유 같은 대도시 보다 조그만 소도시 사람들이 더 친절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로 방문한 곳의 모든 사람들이 친절했다. 여행 오기 전 은근히 걱정을 했었는데(특히 어린 유라가 이유 없는 인종차별로 상처를 받는 건 아닌지 걱정했었다) 쓸데없는 기우였나 보다.

아무튼 우린 밥을 잘 먹고 마테라 시내 중심가로 갔다. 조금 전까지 봤던 고대 도시의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고 세련된 가게들과 보석샵 등이 늘어서 있었다. 고대 도시와 세련된 샵들이 한데 어우러진 기이한 도시. 과거와 현재를 단 몇 걸음만에 오갈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도시.

우린 아름다운 도시 풍광을 두 눈에 꼭꼭 눌러 담고 작별을 고하며 다시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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