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로벨로에서의 결혼식을 구경한 후 우린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했다. 원래는 아내가 구글에서 검색한 식당으로 가려고 했는데 걸어서 가려다 보니 어느새 우리 숙소가 있는 골목 초입이 나왔다. 아니, 이렇게 가까웠었나? 그런데 식당 쪽으로 계속 가려니 인도가 없고 길이 매우 좁아서 유라가 다니기에 매우 위험해 보였다. 우린 하는 수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트룰리 마을로 와서 적당해 보이는 야외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언제나처럼 유라는 오레끼에떼를 먹고 우리 부부는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었는데 간이 세지 않아서인지 매 끼니를 먹어도 이상하게 질리지도 않았다. 오전부터 오래 걷느라 지칠 대로 지친 우린 식사를 얼른 끝내고 오후 내내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근처의 마트에서 장을 봤다. 오늘은 이제부터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저녁도 숙소에서 만들어 먹기로 했으니 간단한 식재료를 사야 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마트를 찬찬히 둘러보며 삼겹살 대용으로 먹을 구이용 고기와 너겟, 고기와 채소를 같이 구운 꼬치를 샀다. 물론 맥주와 함께.
장을 다 보고 숙소로 돌아와 얼른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이 숙소는 객실마다 특정 선베드가 배정되어 있는데, 수영장에 갈 때마다 항상 선베드에 누워있는 손님들이 있었다. 이 숙소에서 지내는 동안 수영장에서 계속 봤는데, 낮에는 선베드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저녁이 되면 나가는 것 같았다. 가끔 해외 리조트에 갈 때마다 느끼는 데, 외국인들은 보통 수영장에서 정작 수영은 거의 안 하고 선베드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음료를 마시며 햇빛을 쬐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방송인 알베르토가 쓴 책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여름이 지나도 피부가 구릿빛으로 타지 않으면 휴가도 못 갔다 왔다며 불쌍하게 본다는 농담을 본 적이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다녔던 바닷가에는 항상 선탠을 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우린 어떻게 서든 해를 피하려고 온몸을 감싸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도 평소에 얼굴과 팔다리는 검지만(유난히 피부가 검다) 몸만 하얀 게 영 보기 싫었던 터라 이탈리아에서만큼은 바닷가에서 수영복 바지만 입고 맘껏 몸을 태웠다.
아무튼 아내는 선베드에서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고 나와 유라는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그런데 해가 조금씩 저물자 물이 제법 차가워져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유라에게 이제 그만 나가자고 아무리 말을 해도 요지부동. 결국 난 아내와 교대를 하고 선베드에서 얼마 남지 않은 석양빛을 쬐며 몸을 녹이며 아내와 유라가 물놀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수영장이 어스름해지고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해서야 겨우 우린 객실로 돌아갔다. 아내는 저녁 준비를 하고 나는 오늘 입었던 옷과 수영복을 빨려고 세탁실로 갔다. 그런데 세탁기 위에 아내의 양말이 가지런히 접여 놓여있었다. 아마 오전에 세탁기에서 옷들을 빼다가 떨어뜨린 걸 직원이 챙겨놓은 모양이다. 마음으로 직원에게 감사하며 객실로 오는데 어김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 녀석이 졸졸 따라왔다.
유라가 고양이와 노는 동안 우린 사 온 음식들을 구워서 식탁을 차렸다. 쌈장을 안 가져온 게 너무 아쉬웠지만 한국에서 싸 온 양념김치와 먹으니 맛있었다. 이탈리아 음식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한국 음식이 그렇게 많이 그립진 않았지만 그래도 삼겹살에 김치에 햇반을 먹으니 가히 진미였다. 같이 사온 너겟과 꼬치도 나쁘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침대에서 쉬던 유라는 피곤했는지 금방 잠들었고, 아내와 나는 객실 앞 야외 테이블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달과 별을 구경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시골이라 그런지 별이 정말 잘 보였다.
계속 밖에 있고 싶었지만 모기가 있어 결국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도 유라 옆에서 곧 잠들고 난 혼자 부엌으로 나와 맥주를 마시며 이탈리아 방송을 봤다. 뭐라 하는지는 하나도 못 알아들지만 그냥 틀어놓고 병맥주를 찔끔거렸다.
침실에선 아내와 딸이 곤히 잠자고 있고 TV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가 흘러나오고 조그맣지만 아늑하게 꾸민 부엌은 안락했고, 맥주는 쌉쌀하며 시원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트룰로 안에서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번잡했던 관광지에서의 시간도 좋았지만 이렇게 조용한 밤에 홀로 보내는 시간도 좋았다. 밤을 그냥 보내주기 싫어 결국 맥주 한 병을 더 마신 뒤 새벽이 되어서야 침대에 몸을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