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소설] 종이컵

by 홍윤표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며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이미 약속시간은 세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고, 그가 오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한 시간쯤 전부터?

어느새 해는 달에게 하루를 인계하고 땅으로 들어갔고 달은 제 몸을 밤 속에 반쯤 숨겼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좁은 골목길을 굽어 살폈다.

종이컵 속 커피는 식었지만 달았고, 하지만 그 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난 종이컵을 비우지 않고 벤치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었던, 그리고 그 뒤로 나도 좋아하게 되었던 노래의 후렴구를 살짝 흥얼거렸다.

그러자 내 옆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종이컵이 같이 불러주었다.

우리가 2절까지 다 불러갈 때쯤, 진눈깨비가 밤하늘을 지우며 흩날렸다.

난 노래를 멈춘 종이컵을 들어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다시 벤치 위에 앉혔다. 그렇게 잠시 같이 앉아 있다가,

아직 길 위에 자리를 잡지 못한 진눈깨비를 밟아가며 자리를 떴다.

저 등 뒤 멀리서,

아직 벤치 위에 혼자 앉아있는 종이컵이 아까 그 노래를 1절부터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눈깨비가 그 소리를 조금씩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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