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숏폼소설] 얼굴

by 홍윤표

김의중 (31세, 초등학교 동창)
"영호랑은 초등학교 사 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어요. 평범한 녀석이었죠. 물론 얼굴이 거울이란 것만 빼고요. 녀석은 창가 쪽 맨 뒷자리를 좋아했는데, 선생님이 창가에서 제일 먼 자리로 배정해 줬죠. 수업 중에 영호 얼굴에 햇빛이 비치면 빛이 반사돼서 교실 전체에 빛이 퍼지곤 했거든요. 근데 사실 전 그게 좋았어요. 지루한 수업시간이 작은 해프닝으로 조금 분위기가 업되거든요(웃음). 그리고, 엄청 예뻤어요. 빛으로 꽉 찬 교실이요."

조명호 (31세, 고등학교 동창)
"아마 이 학년 이 학기 기말고사였을 거예요. 친구 몇 명이서 영호의 얼굴을 이용해서 커닝을 했었거든요. 영호가 답안지를 보면 그게 다 걔 얼굴에 비치니깐, 우린 그걸 보고 베꼈던 거죠. 근데, 그 시험 정말 망쳤어요. 우리가 영호의 실력을 간과했던 거죠. 영호를 필두로 친구들 모두 나란히 꼴찌를 했었어요(웃음)."

라은욱 (33세, 대학교 동아리 선배)
"영호는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아주 인기가 많았어요. 녀석 얼굴에 여러 가지 색깔 조명을 쏘면 순식간에 동아리방이 클럽으로 변했죠. 다들 술자리엔 꼭 영호를 부르곤 했어요."

명현희 (29세, 대학교 과후배)
"영호 오빠는 참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얼굴 얘기가 아니고요. 뭐랄까, 참 착했어요. 배려심이 있었고, 나서기 싫어하고, 양보와 친절이 몸에 뱄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얼굴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김의중 (31세, 초등학교 동창)
"처음엔 선생님들도 영호를 좋아했어요. 일단 착하고 조용하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호를 꺼려했죠. 싫어한 건 아닌데, 그냥 무시랄까요. 수업시간에 발표도 안 시켰어요. 영호가 아무리 손을 들어도요. 나중엔 영호도 손을 안 들게 됐죠."

조명호 (31세, 고등학교 동창)
"왕따가 심했어요. 처음엔 영호와 잘 어울리던 애들도 점점 멀어지더라고요. 소위 말하는 일진 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해도 다들 모른 척했고요. 글쎄요. 왕따에 이유가 있나요? 그냥 싫었나 보죠."

라은욱 (33세, 대학교 동아리 선배)
"언젠가 후배들이 동아리방 앞에서 얼쩡거리더라고요. 그래서 왜 안 들어가냐고 물었더니 안에 영호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언제부턴가 애들이 영호랑 마주치기 싫어했어요. 그래서 제가 총대 메고 영호한테 말했죠. 미안한데 그만 나와줄 수 없냐고. 아무 말 않고 꾸벅 인사하고 나간 뒤로 동아리방에 발을 끊었죠."

명현희 (29세, 대학교 과후배)
"저흰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어요. 반년 정도 만나다가 헤어졌어요. 특별히 오빠가 싫어졌던 건 아닌데, 그냥 힘들었어요, 그땐. 누구 하나 잘못한 게 없는데 그냥 그렇게 끝이 났어요. 시작할 땐 우리가 특별한 줄 알았는데, 끝은 다른 연인들처럼 평범했죠."

김의중 (31세, 초등학교 동창)
"한 번은 영호가 새 지우개를 가져왔었어요. 그때 한창 유행하던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지우개였는데, 그게 너무 갖고 싶었나 봐요, 어린 마음에. 그래서 슬쩍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진짜 나빴는데. 어쨌든, 그 뒤로 영호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요. 걔 얼굴을 보면 제 얼굴이 보이잖아요. 그게 되게 싫었어요. 거짓말하고 도둑질한 제 얼굴이. 그즈음이었을 거예요. 영호랑 멀어진 게."

조명호 (31세, 고등학교 동창)
"왕따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음. 그때 영호 괴롭혔던 애들이 그랬어요. 네 면상을 보고 있음 기분 더러워진다고. 근데 생각해 보면, 영호 얼굴에 비치는 건 자기 얼굴이잖아요. 걔네들은 결국 지들 얼굴이 싫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라은욱 (33세, 대학교 동아리 선배)
"치기 어린 대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저희도 술 엄청 먹었거든요. 신입생들 신고식이랍시고 사발에 침 뱉어서 맥이고, 어린애들 잔뜩 취하게 해서 자취방에서 어떻게 해보려고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다들 병신이었죠. 근데, 그럴 때마다 영호를 보면 걘 멀쩡했거든요. 저희를 멀뚱히 바라봤어요. 그럼 시뻘겋고 눈 풀린 망나니들이 그 얼굴에 비췄겠죠. 다들 그게 싫었을 거예요."

명현희 (29세, 대학교 과후배)
"오빠를 보면 제 슬픈 얼굴이 보였어요. 오빠 눈을 보면 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게 오롯이 보였고요. 그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었어요. 오빠가 싫은 게 아니라, 오빠 얼굴에 비친 제 얼굴이 너무 싫었던 거예요."

박임숙 (56세, 어머니)
"영호 방을 정리하는데 영호 일기장이 나오더라고요. 초등학교 이후로 쓰는 줄도 몰랐는데, 최근까지도 썼더라고요. 거기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혀있었어요.

'그래도 난 사람들의 얼굴이 좋다.'

keyword
이전 20화[숏폼소설]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