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멈췄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들이 서로 충돌하는 듯한, 정지된 순간처럼.
뇌가 멈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 순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3년 전, 평소처럼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나는 실수를 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가볍게 넘길 수 있었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상사가 내게 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순간, 내 몸이 멈춰 버린 것이다. 사자 앞에 겁먹은 토끼가 된 것 같았다. 3분 정도 흘렀을까, 사수는 '바람 한 번 쐬고 오자'며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때 처음으로 심각성을 느꼈다. '이렇게 있으면 진짜 큰일 나겠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친구가 평소 상담을 권하던 말이 떠올라 퇴근하고 광진구 무료 상담 센터에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했다.
21년은 코로나가 한창 유행이었다. 상담 센터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린 걸로 기억한다. 상담자가 있어 의자에 앉아 10분 정도 기다렸는데, 생애 첫 상담이어서 긴장과 호기심이 교차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상담받으면 괜찮아질까?" 잠시 후, 상담실 문이 열리고 내 이름이 불렸다. '김명복 씨, 들어오시면 됩니다.' 상담은 약 30분 동안 진행되었고, 선생님 맞은편에 앉아 "우울증 때문에 왔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틀 전 일하면서 실수했는데 사수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치자 갑자기 몸이 굳어 버렸거든요. 식은땀이 나면서 마치 '뇌'가 멈춘 듯 앞이 깜깜해졌는데 이렇게 있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상담 신청을 했고요". 내 이야기가 끝나고 상담 선생님은 잠은 잘 자는지, 죽고 싶다고 생각했거나, 다른 증상이 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우울 증상이 처음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왔지만 보통 3주 정도 지나면 괜찮아졌다. 그러다 최근 21년도에 급격히 심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울 증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만약 우울증이란 확증을 받으면 초라하게 느껴지는 내가 더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냥 조금 힘들 뿐이야. 곧 괜찮아질 거야"라며 스스로 위안하며 참아 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리 상담받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스스로 문제를 키운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지속적인 경쟁과 압박은 많은 이들을 지치게 한다. 우울증은 개인 문제가 아니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란 말은 우울증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표현이다.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환자는 100만 명에 달한다. 끊임없는 경쟁은 젊은 세대에게 극심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안기고 우울증을 유발하고 있다.
상담이 끝날 무렵 "우울증입니다"라는 말이 들렸고 약물 치료를 권유받았다.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보통 6개월은 약물치료를 지속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약 먹고 나면 멍한 기분이 드실 거예요. 원하시면 소견서를 써 드릴게요." 나는 웃는 얼굴로 '예.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상담실 문밖으로 나왔다. 상담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안동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약물 치료는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야.” 그 당시 나는 약물 치료를 받으면 내 마음이 정말 무너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신체적 고통이라면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몸이 아픈 게 아니었다. 나를 정말 힘들게 했던 것은 내 마음과 영혼의 고통이었다. 삶의 희망과 의욕을 잃어버린 게 근본적인 문제인데, 약을 먹는다고 잃어버린 꿈이 다시 생길까? 아니었다. 만약 꿈을 만들어 주는 약이 있었다면, 벌써 먹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나 자신에게 있었다. 그래서 가장 편안한 곳 내 고향 안동을 선택했다. 지친 내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그렇게 7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으로 이사 온 지 이제 2개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한데, 직장 옮겨야 해서 방을 빼야 할 것 같아서요. 지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몇 마디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섬주섬 짐 정리를 시작했다. 그냥 버릴지 생각도 했지만 내 돈으로 산 물건, 내 돈으로 폐기물 스티커를 사서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최대한 빨리 짐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개인 물품, 전자레인지는 안동으로 택배로 부쳤고, 1인용 침대는 친구 지인에게 8만 원에 판매했다. 당근에는 개당 2,000원에 책상, 의자, 분리수거함을 올려놓자 1시간 뒤에 연락이 왔다. 정리하는 동안 '내가 다시 서울에 올라올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든 버텨 왔는데 결국 내려가게 되었다. 대학교 형에게 안동으로 내려간다고 전화했었는데 그때 그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조심히 가고 다음에 보자."
잠시 일을 하기 위해 경기도로 내려갔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다시 올 수 있을까’란 두려움은 없었다. 지금 당장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취소할지 고민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내 마음이 편해야 서울에서 버티든 할 텐데,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하루하루 연명도 벅차게 느껴졌다. 그때 내 삶은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사실상 강제로 멈춰 버렸다. 세상은 그것도 버티지 못해서 뭘 하겠냐면서 빨리 사라지라고 등 떠미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안동에 도착한 그날도 어김없이 태양은 밝게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엔 뭉게구름 하나가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태양이 지면 달이 뜨고, 별들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지만, 내 마음은 블랙홀처럼 빛을 흡수할 뿐, 빛을 내지 않았다. 달빛조차 들지 않은 채, 무겁고 어둡기만 했다.
출발은 했는데, 지도 없이 여행 가는 기분이다.
예전 같으면 여기저기 들리면서 그 과정을 즐겼을 텐데,
지금은 두근거림보다 막막하고 무섭단 느낌이 더 크다.
삶은 항상 우리에게 '시련'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애써 무시했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신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시련을 겪으며 성장한다. 그런데 잡초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내게도 시련이 찾아오다니, 주인공들도 사실 평범했던 건 아닐까? 혹시 나도 이 시련을 극복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짧은 기대를 해보지만,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내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멈춰버린 내 마음이 강물처럼 다시 흐를 수 있길 바랄 뿐.
세상은 어제와 같지만, 내 삶은 그렇게 갑자기 멈춰 버렸다. 그때는 몰랐다. 나를 멈추게 한 우울증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거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