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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by 김명복


질문이 끝난 자리에서


예전엔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세상과 단절된 채 그저 누워 있고 싶었다.


내 안에 불만과 좌절, 허무가 뒤섞여 그 감정은 격렬했다.



지금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있다.


하지만 그 결은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격렬함 대신 고요함이 있다.


단지, 하고 싶지 않다. 그뿐이다.






예전의 나는 이유가 있었다.



꿈도 없었고, 목표도, 좋아하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 무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이게 맞나?' 하는 의심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자,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풀어야 할 문제가 없어졌고, 오히려 조금 심심해졌다.






나는 예술가다.



조직 문화에 잘 맞지 않고, 개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에 있을 때


비로소 상상할 수 있다.


사회에 섞여보려고 몇 번 시도도 해봤다.


하지만 결국 회사라는 틀 안에선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는 출근 잘하는 특별함이 내겐 없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글쓰기를 잘한다.



전문적인 글쓰기나 대중적인 공감을 일으키는 글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내 감각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잘 포착하고, 그런 점에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다.



소심함이라는 단어 뒤에는 ‘민감성’이라는 다른 이름이 숨어 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이런 특성들을 되짚어 보니,


결국 나는 ‘나다움’을 추구해 온 사람이었다.


그 수단은 글쓰기, 영상, 그림 같은 창작 활동이었다.


그런데도, 한때는 돈을 번다는 이유로 스마트스토어나 블로그 마케팅 같은


내가 진심이 아닌 것들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건 내 길이 아니었다.






이 모든 삶의 조각들을 정리하고 나서야


내 삶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무의식’에 대한 공부였다.



우리는 보통 변화를 이야기할 때,


기술이나 방법, 노하우를 먼저 떠올린다.


이건 외적인 변화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내적인 변화였다.



행동 중심의 사람들은 먼저 시작하고 움직이면서 배운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유형이다.


반면, 나는 사색 중심의 사람이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왜’를 먼저 묻는다.


이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면 움직일 수가 없다.


설령 성취를 하더라도, 그 안에 진심이 없다면 공허함만 남는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말하는 성공보다는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더 집중했다.



무의식을 공부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현실에서 직접 실험해 보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00번 글을 쓰면 현실이 바뀔까?"


"진짜로 믿으면 이루어진다는데, 그걸 믿어보자."



내 삶은 늘 ‘질문하고 실험하기’의 반복이었다.


그 방식이 나만의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 더 이상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게 이상했다.


그토록 원하던 자기이해와 방향성, 삶의 정의까지 이루었는데


정작 질문이 사라지고 나니, 멈춰버렸다.



이 상태를 나는 ‘유보 상태’라고 부른다.


타인의 시선과 외부 동기로부터 벗어난 상태.


지금까지는 무엇이 되기 위해 움직였다면,


이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 상태.


이 상태는 권태롭고 허무하다.


즐겁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그저 ‘공(空)’의 상태 같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그릇처럼 텅 비어 있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욕망이 없다.


욕망이 있어야 움직일 텐데, 이제는 그것조차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상태가 나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욕망이 없다는 건 어쩌면,


이제 외부가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 고요함 속에서


나는 다음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그 질문은 이전처럼 고통이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질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저 살아내는 행위, 창조하는 흐름일지도.



나는 지금, 질문이 끝난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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