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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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입어온 옷을 꺼내어 들면 마치 처음 입었을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내 옷깃을 스친 모든 이들의 각질이 섬유 사이에 박혀 나와 기약없는 여행을 한다. 그 시절 속 그 스타일의 나는 없지만 흔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가끔 블로그 읽은 글 순위에 내 옛날 글들이 올라오곤 한다. 일종의 로스트 테크놀로지처럼 더이상 나도 그렇게 쓸 수 없을 시절의 문체들. 뭐가 그리 슬프고 힘들었는지 목까지 타고흐른 눈물이 키보드 위로 떨어지며 한글자 한글자 채워갔다. 깨어난 현실의 부정인걸까. 망상 속 허우적거림일까.
어리석음의 도를 넘어서 수없이 늘어선 상자대열 중 하나에 들어가 웅크려 내가 가장 작은 상자에 들어가 있을거라 자조한다. 열어볼 용기는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내가 가장 불쌍하길 빈다. 동일한 목적을 동정이란 도구로 좀 더 쉽게 쟁취하고자 노력한다. 비열하고 비겁하고 치졸하며 야비하다. 그런 속임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 싶다면 인간이 아닌 야생의 동물따위여야 한다.
측은함과 동정만이 자라나 초라한 흙밭을 겨우 감싸고 있다. 별 의미 없는 거짓들과 중요하지 않은 감정에 굴뚝엔 흰 연기가 아닌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타고 남은 재가 모여 절대 사라지지 않을 침전물이 되고 미완성의 이야기 속 화산재가 되어 내린다. 상처아닌 상처와 크게 휘둘러진 칼질이 고기의 힘줄을 가로지른다. 뭐가 그리 아쉬워서 한참을 들여다 봤을까. 끝까지 하지도 못했던 그 순간에 무엇을 두고 온걸까. 금속음을 날카롭게 내며 부서진다. 부러지듯 그 형태를 갖추었던 결정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깨졌다.
물이 다 말라버린 연못 가의 도롱뇽처럼 더이상 끌어 안을 수 없던 차가움. 갈라지는 틈 사이로 숨을 겨우 내쉬며 마지막 숨을 내쉴 때엔 이미 원래의 형태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매정할 수 있던 것일까. 내가 내 손으로 끝낸 것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늘 그렇다. 그리고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힘을 빼고 마는 것이 망설임이고 또한 거짓됨이다. 성장의 과정에서 떨어진 잎들이 아직도 곁에서 썩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다 잃어 가루가 되어 내게 흡수되기 전까진 그대로다. 힘없이 기울어지는 나무처럼 제대로 서지 못한 채로 몸이 굳어버린다. 수분할 꽃조차 없이 벌들만 빙빙돈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채 집어던진 글들은 내가 그렇게 흘려보낸 주제들의 유령. 믿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글귀들. 마지막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궤적을 그리며 가로지르는 별들을 바라본다. 뭘 두고 온거지. 그 산자락 언덕에 내가 포기한 것들을 유기한 내 자신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천 자의 글귀보다 한문장의 말이 더 크기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과거의 나로부터 답장이 되어 다시 쏘아 보낼 수 있다면 무슨 판단을 할까. 단방향 소통에 쏘아올린 신호는 나도 모를 언제의 해변에 닿는다. 병 안의 종이는 다 삭아 본래의 의도를 알 수가 없고 대략적인 그림만 그려져 있을뿐. 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들을 왜그리 휘갈겼는지. 내가 나를 잘 알기에 웃음이 나온다.
잘 그러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 자신감의 문제보단 자격의 문제일까. 달콤한 향기가 결코 좋지 않단 것을 안다. 영원히 닿지 않을지도 모를 미지의 땅에 먼저 가서 닿아 담을 쌓아주면 좋겠다. 외부와의 격리가 아닌 내부와의 격리를 위해 철옹성을 지어본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다. 굴러다니는 펜촉에 상처가 나 더이상 잉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면 그 마음을 헤아리겠는가. 잠을 참았던 그 새벽엔 늘 세상의 소리를 잠시 틀어막고 내가 듣고 싶던 노래만 들었다. 그러다 잠시 내려놓은 손가락이 밤하늘을 보게 했다. 온 우주가 마치 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이름모를 별 하나에 콕 눌러 자국을 내본다. 내 어떤 별자리도 품지 못할 것들을 둘러보며 빈 공간에 끝없는 그림을 그린다. 까만 밤에 구불구불한 도로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리치던 그 순간. 가장 아니었을 때에 가장 그러했다. 나는 뭐가 문제였을까. 마구잡이로 뜯어낸 뒤 수습하여 덮어둔 기계는 늘 또 다른 고장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던 것이라 믿으라 하기엔 그러하지 않았던 과거가 그러하다. 사람의 변화를 좀처럼 믿지 않는 내가 나의 무언가를 믿어달라 하기엔 너무 내로남불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난 여전하다. 과거여 너는 무엇을 기대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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