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답은 내일도 나랑 놀자
A
네가 웃으며 너의 아픔을 말할 때, 이유 모를 저림이 들었다. 억지로 웃으며 말을 하는 것이 아닌, 아픈 것이 익숙한 사람처럼,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에게 아픔이 익숙해질 때까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할까 봐. 내게 기대지 못할 걸 네가 알게 되면 나를 떠날까 봐. 네가 나에게 기대기에는 나도 너무나 불안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함께 기대며 중심을 맞춰볼걸. 숨지 말걸. 너의 눈을 바라보며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전해줄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한다. 오랫동안 고마웠다고,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그러니 우리 내일도 함께 놀자고.
B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나에게 겁이 나는 일이었다. 한정되어 있는 마음이라 생각했기에 숨겨놓고 조금씩 떼어 나누어주었다. 누군가에게 드는 마음은 그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는 마음이지, 나의 마음이 한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많은 다툼과 이별이 있었다. 친구, 연인, 그 외의 인간관계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 남아준 나의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편안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지만 모순적이게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고 잘하는 일이었기에, 나는 많은 이야기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어쩌면 버거웠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과 같았다. 살아도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의 아픔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나도 힘들다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힘듦이 더 크거나 작아서가 아니라, 나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아픔을 말할 때 그들이 작아 보인다거나 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믿어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나에게 날것의 마음과 솔직한 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나의 마음과 아픔을 말하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믿음의 유무가 아니라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어둡고 초라한 마음을 설명하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정말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을 때 사람을 찾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눈물이 났다. 정말 오랜만에 펑펑 소리 내어 울었다. 친구는 잘못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상황에 대한 나의 좌절이었다. 왜 나는 친구를 찾았을까. 말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다. 말이라는 것을 이용해 나의 마음을 휘발시키고 싶었다. 내 안에는 불만 가득했기에 마음을 안고 있으면 계속해서 타들어가고 내 안에 뿌옇게 연기가 가득 찼다. 뱉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덜 타들어가고 싶었다. 간절함으로 친구를 찾았다. 그들도 이러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이야기를 하고 가끔씩 화를 내고 울었던 걸까.
A
너는 삶에 의미가 없다고 했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죽을 노력을 할 부지런함 따위 없다고. 마음이 아려왔다. 솔직히 화도 났다. 네가 아닌 나에게. 먼저 물어봐주지 못했던 나의 안일함에, 나의 방관에 대해 화가 났다. 분명 너는 오랜 고민 끝에 나에게 전화를 했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너의 흐느낌은 나에게 ‘왜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주냐고, 너무나 힘들었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너는 나를 탓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너의 마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너는 항상 그늘 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품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는 모든 괜찮다는 듯이. 모든 걸 가져가도 된다는 듯이 행동했다. 표면적으로 너는 단단해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굳건하게 설 수 있는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구나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나는 너를 평소대로 대했다. 네가 내게 그러했듯이, 너를 그저 슬프고 괴로운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너에게도 분명 빛이 있으니, 너무나 밝게 빛나서 너의 주변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게 비춰주고 있으니 그 모습을 봐주고 싶었다. 네가 노력하고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너를 바라보려 했다.
너의 아픔을 듣고 난 후, 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괜히 신세한탄을 했다고, 무책임했다고 사과를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내쪽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너의 아픔을 눈치챘음에도 나를 더 생각했다.
너에게 말하고 싶다. ‘나도 괜찮다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나도 너에게 그늘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고.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B
미안했다. 책임을 묻는 것만 같아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대신 찾아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제발 말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에게 해준 것만큼 나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미운 마음이 드는 내가 너무나 싫었다. 잊고 있었다. 나의 솔직한 마음, 아픈 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면 꼭 이런 생각이 들었기에, 그래서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너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정확히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내가 너에게 쌓아 올린 단단함의 모습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후회가 들었다. 나는 늘 이렇다. 나는 그들을 보듬어주고 그늘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고 그렇게 혼자 나름의 만족을 느끼며 살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꽁꽁 숨기고 나를 썩히고 모른 척했다.
결국, 모든 것을 들켰다. 내가 한 선택이지만 후회와 미안함이 동시에 몰려오는 무겁고 축축한 마음이 든다.
너는 고맙다고 말했다. 기대주어서 고맙다고, 아픔을 말해줘서, 나를 보여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늘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왔던 나는 너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도 단단한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안심이 들었다.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구나 생각했다.
상대방에게 말을 하는 것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익숙해지거나 당연해지는 순간 그 관계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너는 늘 나에게 고마움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나는 그런 너에게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어쩌면 너는 나에게 외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쩌면 너에게 벽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 벽이 무너졌다.
A/B
그러니 우리 서로에게 기대자. 누군가가 쓰러지면 붙잡을 수 있게, 작은 변화를 눈치챌 수 있게. 나와 너. 우리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하자고, 서로에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자고. 아픔을 나누어 갖자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되어주자고.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마주 보며 웃어넘기자고.
우리 내일도 함께 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