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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연 Nov 29. 2024

닿을 수 없는 거리 1화

프롤로그

더 이상 진이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나를 잃는 것과 동일시된다. 나는 진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떠한 꿈도 꾸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텐데, 진이는 계속해서 나를 밀어내고 돌아가라고 말한다. 서로의 자리가 있다는 말로 나와 함께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내게 깨달음을 주었을 때 그 원인은 진이었고, 그 사랑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았던 이유 또한 진이었다. 진이는 나였고, 사랑이라는 것은 진이었고, 진이는 결국 나의 삶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다.


서울에 있는 ㅁ대학병원 중환자실에 4개월째 숨만 붙어있는 내가 있다. 사고의 원인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스스로 명의 단절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떨어졌고, 죽지는 못했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수많은 응급처치와 수술을 했지만, 나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가족들은 점차 지쳐갔고,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갈수록 적어졌다. 그 사람들 중에 진이는 없었다.


제1장

2018년 5월 어느 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나는 우연히 손님으로 온 진이를 만났다. 험한 일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처럼 뽀얀 피부와 카드를 내미는 고운 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진이는 처음부터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고 갈게요" 진이가 말했다. 나는 멍한 얼굴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문을 받고 직접 자리로 가져다 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결제한 카드를 내밀었다. 이 카페에서 일한 지 2년이 넘어가고 내가 어릴 때부터 살던 동네였기에 단골들과 동네 사람들의 얼굴과 분위기를 아는 나로서는 진이가 신비로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주문을 받은 걸 깨닫고 서둘러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진이의 자리로 갔다. 진이는 2인석에 앉아있었고, 맞은편 의자에는 메고 온 백팩을 올려놓았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서 세팅을 하고 있던 진이에게 다가가 음료를 건네주었다.

"주문하신 음료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그 짧은 시간에 내 심장은 이상하리만치 빨리 뛰었다. 사랑이라던가 첫눈에 반했다는 그런 감정을 믿지 않았기에 순전히 진이가 이 동네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놀란 것이 분명하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그렇게 그날은 진이가 2시간 정도 있다가 잘 마셨다는 인사와 함께 컵을 주고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 진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카페에 왔고, 다행스럽게도 그날이 내가 일하는 날이라 자주 마주쳤다. 어느 날은 편안한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오고, 또 어떤 날은 면접이라도 보았는지 잘 다려진 정장을 입고 왔다.


기온이 30도가 넘어가는 아주 더운 날이었다. 밖에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나는 날씨였고, 여름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늘 그렇듯 나는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문이 열리는 종소리와 함께 진이가 들어왔다. 날이 더워지면서 사람들의 옷이 짧아졌고, 진이는 팔이 드러나는 반팔을 입고 카페에 왔다. 그날도 늘 그렇듯 같은 음료를 시킬 것이라 생각한 나는 진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드시고 가실 거죠?"

"네, 이제야 기억해 주시네요."

이 말의 뜻을 한참 곱씹고 되새겨보다 내가 그냥 웃고 넘겨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스스로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더 말을 이어갈걸, 원래 알고 있었다고, 진작에 나는 당신이 익숙했다고 말해볼걸 하는 후회를 하며 커피를 내려서 진이의 자리로 갔다.

"날이 참 덥죠? 이럴 땐 아메리카노 말고 맥주가 마시고 싶어요."

진이의 자리로 간 나는 갑작스러운 진이의 말에 놀라서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어... 네... 아... 죄송해요. 다시 만들어드릴게요."

참 바보 같았다. 그냥 '그러게요, 이제 정말 여름인가 봐요.'라는 말이라도 할걸 하며 나는 또다시 후회했다. 그 질문이 진이와 나를 이어주는 첫 번째 연결이 될 수도 있었다는 기대가 나를 더 실망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커피를 내리면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질문이 오더라도 아니, 혹여 질문이 오지 않더라도 꼭 말을 해보겠노라 다짐하며 진이의 자리로 갔다.

"죄송합니다. 아메리카노 다시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말을 끝내버린 바보 같은 내가 뒤를 돌아 카운터로 돌아가려는데 진이가 말을 걸었다.

"같이 맥주 마시러 가지 않을래요?"

순간적인 시간에 순간적인 생각들이 오가며 나는 큰 소리로 "네! 좋아요!"라고 외쳤다.

카페에 진이를 제외한 손님들이 없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봤더라면 내가 진이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으로 착각했을지 모른다. 몇 시에 끝나냐는 물음에 나는 5시라고 대답했고, 진이는 약 2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나에게 이 2시간은 학교 수업시간처럼 너무나도 느리게 지나갔고, 5시에 퇴근을 한 나는 짐을 챙겨 진이에게로 갔다.


진이와 나는 가게 근처에 있는 펍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자리에 비치되어 있던 메뉴판을 보며 어떤 음료를 마실지 골랐다.

"저는 흑맥주 마실게요."

평소에도 혼술로 흑맥주를 자주 마시던 나는 메뉴를 대충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럼 저도 같은 걸로 마실게요. 저도 흑맥주 좋아해서..." 진이가 말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김설희라고 해요. 나이는 올해 23살 됐어요."

진이는 웃으며 자신의 이름은 박진이고, 자신도 나와 같은 23살이라고 했다. 동갑친구가 별로 없었던 나는 진이가 나와 동갑이라는 말에 너무나 신나 하면서 말을 놓자고 했고, 진이도 그 제안을 수락했다. 주문한 흑맥주 두 잔과 기본 안주인 프레첼이 나오고 우리는 쉬지 않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취미는 무엇인지, 어떠한 영화를 좋아하는지, 평소에 잠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지만 진이와 함께였지에 즐거웠다. 문득 진이가 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나에게 같이 맥주를 마시자는 제안을 했는지 궁금했다. 조금 더 일찍 궁금해했어야 했던 질문이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와 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들뜸으로 인해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근데 나한테 왜 맥주 마시자고 했어?"

"다른 이유는 없고, 설희 네가 좋은 사람 같았어. 그래서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이 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나에게 말했다.

"너는 살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어. 나와는 다르게."


이 말을 하고는 진이는 조용히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살기 싫어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이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진이는 어떤 사람인 걸까 하는 물음이 나에게 일렁였다.

"그럼 진이 넌 살고 싶은 사람이야?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야?"

죽고 싶은 사람이냐고 물어보려다 그 말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와서 애써 돌려서 물었다.

"나는 죽음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진이가 대답한 순간 진이의 눈에 공허함이 비쳤다.

진이는 자신이 지금 왜 살아있고, 숨은 왜 쉬고 있는지 모르겠고, 죽고 싶지만 하루를 버티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려 하고, 커피를 마시고 또 자신과는 반대로 살고 싶어 보이는 나와 술을 마시는 지금이 자신에게는 굉장한 모순이라 더 죽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순간 화가 났다. 어떠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이에 대한 감정이 점점 호감으로 변하고 좋아함으로 정의가 될 것 같은 순간이었기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소중한 생명인데 그걸 왜 버리려고 해? 만약 주변에 살고 싶은데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들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들까?"라고 되물었다.

"난 할머니 손에 자랐어. 부모님은 얼굴도 몰라.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집으로 보내져서 작년까지 같이 살다가 할머니께서 사고로 돌아가셨어. 나는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들을 보면 자꾸 죽고 싶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진이는 모든 것을 경험했고, 나는 아까 내가 한 말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취기가 올라와서인지 결국 사과하지 못한 채로 우리의 시간은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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