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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연 Nov 30. 2024

닿을 수 없는 거리 3화

집에 도착한 후, 샤워를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 순간 알람소리와 함께 진이에게 연락이 왔다.


“잘 들어갔어?”


참 아무렇지 않은 연락이었다. 내가 화를 내고 애원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보통의 나날들과 같은 날처럼 그런 담담한 연락이었다.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하는 순간 정말 내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휴대폰을 엎어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만약 내가 진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 자신의 사람들의 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싶어서 그렇게 죽음을 원하는 마음. 그 마음을 반대하고 애원하고 정신을 차리라며 화를 내는 사람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는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이를 이해할 수 없기에 그와 관련된 모든 질문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검색창에 죽음을 검색했다. 사전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죽음: 생명체의 삶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명체의 모든 기능의 영구적인 정지로 말미암아 신체가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삶이 끝나는 것이라...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럴 날이 오겠지만 당장은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너무나 낯선 단어처럼 느껴졌다. 이런 단어가 진이에게는 참 가까운 단어였구나. 오히려 삶보다 죽음과 더 친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진이에게 답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자보다는 전화를 하면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진아, 뭐 하고 있어?”

“설희야 잘 들어갔어?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어. 너만 남겨두고 그냥 가버려서 미안해.”

뭐 하고 있냐는 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진이는 내게 사과를 했다. 그 말이 우리 사이에 있는 벽을 더 높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난 괜찮아 내가 순간적으로 너무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 나야말로 미안해.”

그러자 진이는 아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안도의 한숨인지, 나에 대한 답답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슬픔이 담긴 한숨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설희야, 내가 계속 이런 이야기하는 거 싫고, 화나는 거 아는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너 말대로 난 이기적인가 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진이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다른 이야기도 아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사람이 만난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간절해 보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거나 말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진이었다.


“진아, 네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서 기뻐. 하지만 그만큼 슬프고 화가 나. 그 말에 네가 진짜로 책임을 질까 봐. 그게 현실로 일어나서 너를 잃게 될까 봐. 난 너를 잃을까 봐 너에게 화를 내. 그런 모습이 나도 낯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해. 나는 너 덕분에 사는 게 더 행복해졌어. 너랑 연락하고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고 너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게 특별한 행운처럼 느껴졌어.”


이 말을 한 순간, 내가 무책임하게 진이에게 부담을 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 깊숙이 가둬뒀던 얘기를 시작했다.


“진아, 나는 네가 좋아. 네가 내 말에 웃는 것도, 내가 내린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것도,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네가 상상할 수 있다면 실제로는 그 상상보다 훨씬 더 큰 존재일 거야. 그래서 난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해. 그렇게 하려면 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건 싫어. 네가 흔들리지 않고 그 마음을 유지하는 게 네 안에 내 생각은 없어서, 네 미래에 내가 없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힘들어. 나만 너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너무 괴로워 너를 응원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미운데, 응원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지는 않아.”


한순간도 쉬지 않고 벅찬 호흡으로 말을 했다. 진이는 내 말을 가로막지도 않았고, 중간중간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기다려주는 것만 같아서 계속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을 끝낸 뒤 짧은 정적 끝에 진이가 말했다.


“설희야 난 올해가 가기 전에 나와 내 사람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거야. 그리고 내 자리를 찾으면 나중에 네가 날 찾아오기 쉽도록 내 주변을 꾸며놓을 거야. 잠깐의 이별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아있는 동안 너를 사랑할 거고, 너를 지켜줄 거고, 내가 죽은 후에도 똑같은 마음으로 너를 바라볼 거야.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이 있잖아? 설희 네가 나를 만지거나 볼 수 없어도 너에게 내가 존재한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 줘. 웃으면서 나와 시간을 보내다가 잠깐만 먼저 보내줘.”


이때 알았다. 나는 진이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어쨌든 나는 진이를 보내줘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이해를 할 수는 있었다. 나는 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무리 말로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8월의 여름이 지나고 9월과 10월, 11월을 우리는 매일 함께 보냈다. 보통은 동네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진이에게 좋고 예쁜 것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 매일 새로운 길을 함께 걸었다. 익숙한 대화였지만 늘 새로웠고, 그랬기에 진이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연말이 다가오고 사람들이 올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롭고 아주 아슬아슬한 하루들을 보내며 가능한 많이 진이를 내 눈에 담으려 애썼다.


이 순간들이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이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가 알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오기를 바라는 것 밖에 없었다. 진이를 멀리해야 할지 더 가까이 많이 알아가야 할지 어떤 것이 덜 후회스러울지 난 알지 못했고. 그저 다가오는 진이를 막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2월 중순이 넘어가는 어느 날 진이는 나와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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