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찾아오는 외국인

제발 인기척 좀

by Ubermensch






이번 부산 집필 여행에서 같은 숙소에 5일간 연박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가 보이는 숙소 내 라운지랄지 카페랄지 여하튼 공용 공간에서 혼자 글도 쓰고 영상도 보고 술도 먹고 했다. 나는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누가 다녀가는지 보이지도 않지만, 내가 며칠째 지정석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다 보니 연박의 시기가 겹친 누군가에게는 내적 친밀감이 자극된 듯했다.


며칠 전, 전어회무침을 먹으면서 이혼숙려캠프를 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영어로. 나는 뉴질랜드에 짧은 체험학습 한 번 다녀온 걸 제외하면 해외 유학이나 연수 경험도 없고, 영어의 5형식도 끝내 외우지 못했다. 그래도 미드를 많이 봐서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당연히 토익도 900점이 훨씬 넘고 이런저런 영어 성적도 잘 받았다. 난 못하는 거 빼곤 대부분 잘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그 야심한 시간에 소주와 전어회무침을 먹고 있는 내게 접근한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본인이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데, 어떤 한국 남자랑 번역기를 돌려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요지는 본인이 답장을 할 때 한국어 표현이 한국인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지 봐주고,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미세한 뜻과 번역기 표현의 격차를 한국인인 내가 적절하게 손봐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혼자 전어회무침에 소주 먹고 있는 모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부탁하기에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까다로운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상냥하거나 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거나 모진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 새벽시간 뜬금없는 외국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원하는 바를 충족해 주기 위해서는, 일단 그 대화 상대방 남자와 그녀의 관계부터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하고, 여자가 그 대화를 통해 목적하는 바도 파악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국문과 출신으로서 자연스러운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비록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수사관답게 이것저것 자세하게 물어봤다. 남자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미래에 이성적인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요. 이 남자와 언제 만날 것인가요 등. 그 외국인 여자는 상대방 남자는 아마도 본인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듯 보이나 자신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성적 호감이 전혀 없는 사람 치고, 내게 자연스러운지 봐달라는 문장은 "다음 주 언젠가 만나요." "한국어를 잘 못해서 부끄러워요." 이런 류의 것이었다. 나는 좀 의아해서 정말로 로맨틱 릴레이션십에 대한 익스펙테이션이 네버에버 없는 게 맞는지를 세 번 더 확인한 이후, 남자가 절대 기대하거나 오해할 소지가 없도록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을 때나 풍길 법할 냉랭한 온도의 문장을 써줬다. "조만간에 한번 보든지 하시죠."라고. 부끄럽다(shy)는 표현은 너무 걸리쉬하니까 절대 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후, "아직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화가 조금 어렵습니다."는 표현을 적어줬다.


그 외국인 여자는 내가 국문학과 출신의 기자 출신의 검찰수사관인지는 전혀 모르고,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자신과 대화가 되면서 새벽마다 라운지에 출몰하는 친절한 인간 번역기로 인식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새벽 나를 찾아왔다. 나는 뭔가에 몰입하면 주변 모든 것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누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하얀 외국인 여자는 마치 귀신처럼 소리 없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뭔가를 재미있게 보고 있거나, 글을 쓰고 있거나, 뭘 맛있게 먹고 마시고 있으면, 그때는 말을 걸기가 미안했는지, 그러면 본인의 다른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제 새벽에는 내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내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너무 놀라 경기를 일으킬뻔했다.


오늘 새벽 3시에는 직원이 이제 공간 청소를 해야 하니 들어가서 자라고 불을 끄며 압박을 주는데도, 그 외국인 여자는 첨단 번역 어플 사용이 가능한 아이패드로 충족되지 않는 본인의 미묘한 의도를 섬세하게 번역해 줄 인간 번역기인 나를 보내주기 싫어했다.


결국 나는 시간도 늦었고 이제 자러 가자. 연락처를 줄 테니 다음에 또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게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보았지만 나는 SNS를 전혀 안 하기 때문에 핸드폰 번호만 줬다. 그녀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다는 대화 상대방 미지의 남자는 내가 교정해 준 차가운 문장을 받고 상처를 입었을 것 같지만,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음에도 그녀는 절대로 그에 대한 이성적 호감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부산은 참 하루하루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잠시도 심심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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