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고온
보편적인 9 to 18 기준의 삶을 강제로 살아야 하지 않는다면 사람마다 고유한 생체 리듬이 있을 것이다.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았던 수험생활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 나만의 리듬은 해가 뜰 무렵 잠이 오고 달이 뜰 무렵 깨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태양보다는 달의 리듬에 맞는 사람이었다. 태양이 뜬 낮은 너무 강렬해서, 부끄러움이 많은 나를 강제로 낱낱이 노출하는 듯한 불편한 기분이 든다. 집에서 쉬는 날 외출할 일이 있어도 되도록 해가 지면 나간다. 어두운데 있다가 갑자기 해를 보면 재채기가 나오는 아츄 증후군도 있다.
고소한 정수리는 내가 강한 햇빛을 보고 재채기를 할 때마다, 그걸 지어내는 거라고 요란을 피웠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로 사랑과 가난과 재채기를 꼽고, 8년 이상 반복된 내 아츄 증후군을 옆에서 지켜본 그 애는 마침내 사실은 내 아츄 증후군이 너무 귀엽고 부러워서 시샘한 거라고 인정했다. 고소한 정수리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 딸꾹질을 하는 습성이 있고, 그것도 꽤나 귀여운데 왜 아츄 증후군을 그렇게 시샘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강한 햇살에 살이 타는 것도 잡티가 생기거나 자외선으로 인해 노화가 되는 것도 싫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 편안하다. 그리고 밤에 뜨는 태양인 달을 사랑해.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지만 바라보기에는 너무 강렬해서 직시하면 시력을 잃을 것만 같다. 달은 그런 부담이 없이 편히 바라볼 수 있다. 소원도 빌 수 있고. 왜인지 슬픈듯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달의 낮은 120도로 뜨겁다. 반면 달의 밤은 영하 150도로 얼어붙는다. 극단적인 일교차를 가졌다. 내 성격도 그런 면이 있다.
달의 핵심 내부 온도는 1,300~1,600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겉으로 보이는 달의 표면은 얼핏 차갑게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아주 뜨거운 천체다.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얼마 전 내가 아는 어떤 물리학자가 달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고 알려줬다. 가시광선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달도 적외선 형태로 미약하게나마 빛을 낸다고 한다. 그리고 달은 지구의 자전 속도를 조절하고, 인력으로 지구의 바닷물을 움직여 해양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글거리며 요란을 떨지 않으면서 조용하지만 커다란 힘으로 지구의 바다를 움직이고, 어두운 밤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은은한 빛을 내어준다.
달이 지배하는 밤의 고요는 세상을 은밀하게 품는다.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지 않고,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준다. 수줍음이 많은 누군가도, 어둠에 기대어 실루엣만 살짝 드러내며 나와볼 수 있다. 어둠 속 은빛 아래 누구든 속살거릴 수 있다. 시상과 영감과 사랑도 밤의 달빛 아래에서 피어오른다.
우리는 뜨거운 불에 대한 이미지라 하면 타오르는 붉은색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 붉은색 별이 가장 낮은 온도고, 주황색-노란색-흰색-파란색 별 순으로 뜨겁다. 내가 아는 물리학자가 알려줬다. 오렌지색 별은 표면온도가 6천 도인데, 파란색 별은 표면온도가 1만 도가 넘는다고.
내 사주에는 화가 네 개나 있어서 불이 몹시 과도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차가운 사람이라고 한다. 손발도 몹시 차갑고. 남들에게 쌀쌀맞고 냉하게 굴 때도 많다. 하지만 나는 사실 파랗게 타오르고 있는 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