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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죽음

수면에 대하여

by Ubermensch




어제 아침 또 명치가 쿡쿡 아픈 느낌에 깨어났다. 집에 약이 없고 근처에 약국도 없고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다시 잠에 빠지기로 결정했다. 위경련에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집에 있던 타이레놀과 수면제를 먹고 다시 누웠더니 긴 시간이 흘러 오늘 아침이 됐다. 그러니까 총 22시간 정도 연이어 잠을 잔 것이다. 깨어나보니 아파서 눈물이 조금 흘렀던 건지 뺨까지 넓은 면적에 눈곱이 말라붙어있었고, 먹은 것은 없지만 얼굴이 부어있었다. 잠을 굉장히 오래 잤더니 꿈도 무척 여러 가지 꿨다. 슬픈 꿈, 이상한 꿈, 아픈 꿈 등등. 너무 오래 누워있어 허리가 쑤셨다. 역시 사람은 직립 보행을 해야 한다.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고충이 많겠다. 몰골도 남루해지고, 허리도 쑤실 테니까.


22시간 수면에서 깨어나자 비로소 움직임이 가능해졌으므로 차를 타고 운전을 해서 약을 잔뜩 사 왔다. 약만 먹으면 금방 나아지는데 약이 집에 없어서 장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던 신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고통이 자연적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면 적절한 시점에 치료받지 못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 독거인구가 800만에 달하고, 그 비중은 전체 가구수의 36퍼센트 이상이라고 한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해마다 3천 명 이상이 홀로 지내다 고독사를 맞이하며, 그중 남성 비중이 84%, 연령대로는 50-60대가 가장 취약한 그룹이라고 한다. 나는 그 취약 그룹에 속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


잠을 작은 죽음으로 보는 관점은 아주 오래된 철학·종교·문화적 사유다. 플라톤은 철학을 죽음을 연습하는 일이라 했고, 수면을 그 연습의 한 형태로 간주했다. 영혼이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분리되어 순수한 사유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육체가 멈추고, 영혼이 다른 차원으로 미끄러지는 시간. 종교적으로도 잠을 작은 죽음으로 표현하곤 한다, 영혼이 잠시 떠났다가 다시 육체로 돌아온다는 식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욕망의 상징적 실현으로 보았고, 그 상태를 의식의 사망에 비유했다. 잠은 죽음의 리허설이자, 생이 반복적으로 죽음의 경계를 건너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환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처럼 거창하게 인류의 원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환생할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하루의 피로가 스민 몸을 눕히고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뜨면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매일 죽음을 연습하고 있으므로 언젠가 마주할 죽음에 대한 공포도 크게 느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화하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니까. 공포란 미지의 영역에 대하여 내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생각해 보면 매일의 수면을 통해 우리는 예행 연습을 하고 있다.


위경련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수면으로 도피했다가 토요일 하루를 홀랑 날려먹고 죽었다 깨어난 나는 생각한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별 대단한 게 아니구나. 그렇게 매일 갓 태어난 아기처럼 또 하루를 살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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