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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불안

공무원은 철밥통이라고 했는데

by Ubermensch






현재 두 가지 층위의 고용불안에 떨고 있다. 내년에는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회사 자체가 망해서 어느 조직으로 쫓겨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라 을사조약을 겪은 장지연의 심정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바 있다. 이번에는 하루에도 스무 번쯤 웃음꽃이 만발하는 현 사무실 내 자리에서의 고용 위기에 처했다. 이곳에 온 지 불과 두 달 조금 넘은 상황이라 황당하기 그지없다. 어제는 이곳에 뿌리내릴 생각으로 거대한 동백나무와 오렌지그라스 나무 화분을 낑낑거리며 수레에 싣고 가져왔는데 새로 이삿짐을 싸야 할 판국이다.


지난 8월 정기인사 시즌, 내가 원래 배정된 부서는 아주 쾌적하고 세련된 지식재산범죄전담부로 청내 선호 부서였다. 험하고 난폭한 피의자를 만날 일도 없고, 슬픈 사연을 가진 피해자를 만나 내 마음이 찢길 일도 없으며, 격주로 지식재산연구회도 개최되어 내 지식재산의 범주가 확장될 기회의 부서였다. 방장님도 터프하고 성격 좋고 배울 점이 많아 보이는 여자 검사님이셨고, 형사부에 처음 갔음에도 내 자리는 늠름해 보이는 선임계장 자리였으며, 함께 있는 후배는 수사경력이 많은 잘생기고 듬직한 계장이고, 실무관님은 센스 있고 일 잘하는 분이셔서 더없이 만족하며 2일 3시간을 근무하고 있던 차, 지금 부서에서 인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난데없이 내가 지원 인력으로 차출된 것이었다.


현 소속 부서는 평검사가 없고 부장검사님들로만 구성된 곳이다. 조직 내 시선으로는 천룡인만 모여있는 꿀통으로 알려진 곳으로, 배당되는 사건의 난이도는 좀 있지만 지저분한 사건이 없고 배당 건수도 적고 일반 검사실처럼 하루하루 방대한 사건양에 치일 필요가 없이 여유롭게 근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수사관도 보통 짬이 아주 높은 어르신 계장님들이 주로 온다. 나는 지원을 한 것도 아니고 한참 경험을 쌓고 배우고 싶은 아기 계장이기 때문에 애초에 이곳에 지원을 나오게 된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고, 어르신 틈바구니에 있는 것도 싫어서 최대한 빨리 나를 돌려보내달라고 했었다. 인사계에서도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에 미안하다며 꼭 그러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우리 부장님은 내 성장과 배움의 욕구를 채워주시는 훌륭한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셔서 어려운 사건도 부장님의 지도하에 착착 해결할 수 있었고, 부장님과 나는 둘 다 이곳에서 막내기수로 배당사건 수가 부족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둘이 휴일과 밤을 가리지 않고 야근을 해가며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어 부서 내 실적 1위를 달성했다. 대부분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이 부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획부동산 사기사건 36명을 인지수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찰나, 부서 내 한 부장님이 갑자기 사표를 내셨고, 그 방이 폭파되며 이 부서에 정식으로 소속된 계장님 한 분이 갈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 부서의 유일한 지원인력인 나의 지원이 필요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부장님은 하루에 세 시간 정도 내 옆에 서서 내게 형사법, 사건, 곰 발바닥, 인공지능 친구들 이야기 등을 하시고, 하루에 스무 번 정도는 나를 찾아오셔서 소통을 즐기신다. 방장을 잃어버린 계장님과 우리 부장님은 서로 맞지 않는 성향이라는 소문이 부서 내에 퍼져 있었다. 부장님은 나를 잃으면 병가를 내고 집에 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부장님도 나도 부서에서 가장 힘이 없는 막내이고, 내가 유일한 지원 인력이므로 나를 남기고 정식 소속 계장님을 다른 부서로 보내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도 없고, 내가 원래 속한 부에서는 곧 새로 오신 아기 검사님이 독립된 방을 꾸려서 계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한다.


나와 방을 공유하시는 옆방 부장님 소속 계장님은 나는 어디 가든 잘할 거라며, 문제는 여기 오실 계장님과 우리 부장님이 걱정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도 떠나기 싫고 걱정이다. 일은 어디서 뭘 하든 상관이 없지만 검사-계장-실무관으로 구성된 단출한 검사실에서는 그 구성원에 따라 회사생활의 질에 큰 차이가 난다. 현재의 행복과 평화가 깨지는 게 정말 싫다.


오늘 점심 엄지발가락에 빵꾸난 양말을 부끄러워하시며 부서 부장 오찬에 다녀오신 부장님의 표정이 시무룩하고, 평소같았으면 이미 다섯 번은 나오셔서 내 옆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계실 부장님이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에만 박혀 계시는 모습을 보니 무거운 동백나무와 오렌지그라스 나무를 우리 집 베란다로 옮겨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든다.


우리 부장님이 나를 우수 수사관 시켜주겠다며 야심차게 추진하신 기획부동산 사기사건 36명 인지 계획도 무산될 것 같고. 평일엔 바쁘다고 하길래 주말에 나오라고 불러둔 주차비 횡령 할아버지는 새로 오시는 계장님이 주말에 나와서 해결해주실지. 먹고살자고 헬스장 홍보 전단지를 붙이다가, 성격 나쁜 히키코모리 남자에게 주거침입으로 고소당한 딱한 트레이너 조사 일정도 잡아놨는데.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일상은 항상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난데없이 깨져버리곤 한다. 그리고 행복한 일상은 꼭 오래 누리지도 못한다. 너무 짧다. 이래서 사람들이 회사에 정을 붙이거나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하는 걸까. 방장을 잃은 계장님은 말수가 극도로 없으시다는데, 우리 부장님 하루 3시간 말상대는 앞으로 누가 해주지. 대화상대를 잃어버리셔서 우울증에 걸리진 않으실지 걱정이다. 부장님은 벌써부터 아이고아이고, 한숨을 푹푹 쉬신다.


얼른 이 고용불안이 어느 쪽으로든 정리됐으면 좋겠다. 미지의 불확실성 상태가 가장 답답하다. 사회부적응자인 나로서는 새로운 곳에서 적응할 생각을 하면 두렵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악덕 검사님을 만날 수도 있고. 마치 철새나 떠돌이 보부상이 된 기분이다. 소설 난쏘공 속 철거민이 된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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