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는.
살면서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받았다. 그 사랑은 우리 친할머니의 사랑처럼 절대적이고 헌신적이고 숭고한 형태의 사랑, 내 몸을 훑는 시선에서부터 느껴지는 에로스적 욕구로부터 비롯된 사랑, 연약하고 불안하고 결핍된 부분에서 자극된 듯한 보호본능적 부성애 형태의 사랑, 지적- 정신적 면에 이끌린 정서적이고 플라토닉적 사랑, 나에 대한 존경과 환상에서 비롯된 숭배에 가까운 사랑, 나를 지배하거나 통제하거나 정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파괴적인 사랑, 이중 몇 가지가 결합된 형태의 사랑 등. 사랑이 지나쳐 폭행을 당하는 느낌이 들고 질식을 할 것만 같은 수준에 이르러 그만 좀 해달라고 외칠 정도까지의 과한 사랑을 한평생에 걸쳐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늘 갈망하는 것은 사랑보다 이해와 인정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해 후 인정이다. 사랑은 그다음이다. 사람의 애착유형과 성격,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은 보통 유년기나 성장환경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나는 불안 회피형 애착에 가깝다고 한다. 나는 우리 가족 구성원들이 그럭저럭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인지는 하고 있으나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확신한다. 그게 늘 답답하고 속이 터지고 나를 폭발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지금은 진작에 성인이 되었다 못해 늙어가는 중이고, 한계를 인식해 어느 정도 타협이랄지 포기랄지 기대를 놓아버렸지만, 어린 시절 우리 가정 내에서 일어난 수도 없는 전쟁은 이해의 부재로부터 비롯됐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왜 그렇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수고 대들고 오열했는지 지금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터진 속을 봉합하지 못한 채 그 잔해물과 파편을 안고 살아간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하지 못한 사람의 사고 회로와 그 전개와 그에 따른 좌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위 몇 프로에 속하는 두뇌가 어떤 식으로 기능하고 작동하고 확장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두뇌를 이용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성과를 내는 게 가능한지 그런 대단한 건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줄로만 안다. 본인의 자식, 본인의 누나 등이 어디까지 가능한 사람인지 여부에 대해 미처 상상하지 못한다. 그냥 그들이 인식하는 기준과 수준으로 나의 수준을 기준짓는다. 그들의 눈으로 보는 나는 별나고, 이상하고, 화가 많고, 수시로 폭발하고, 싸가지가 없으며, 지밖에 모르는 폭군 독불장군이다. 내가 현실에서 매일 겪는 좌절과 비참과 분노와 억울함과 수치심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로서는 추측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 뇌로 내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으므로.
그렇다고 그들이 멍청하고 감각이 없고 아무 생각이 없고 그 나름의 고통이 없는 무지하고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 모두가 보편적인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내가 천재로 대우받는데, 나와 다른 그들끼리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에서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참으로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평범한 가정에 속해 평범하게 살기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그걸 가져보지 못했고, 그러면 내가 이다음에 커서 만들고 싶었는데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된다. 어쩌다 로또를 맞은 것처럼 나를 이해해 준 사람을 만나 그에게 인정도 받고 어떤 종류의 사랑까지 받은 것 같은데 그 순간은 또 찰나로 끝나버렸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두운 밤 같던 내 세상에 잠시 태양이 다녀갔던 것 같았다. 그때는 내 척박한 세상에 나무도 자라고 꽃도 자라고 평범한 낮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빅뱅이 일어날 줄 몰랐다.
다시 황폐해진 내 밤나라에 갑자기 달이 떴다. 하나 둘 별도 떠올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앞이 조금씩 보인다. 사실 애초에 태양은 내 세계에 크게 어울리지 않았다. 너무 크고 밝고 눈부시고 그래서 부자연스러웠다. 내 세계에 맞는 별들이 찾아와 조금씩 빛을 내어주고 있다. 서로 이해가 가능한 별들이, 적당한 거리에서 간격을 유지한채 각자의 온도로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며 떠오르고 있다. 커다란 달과 별들이 미지근한 빛을 내 깜깜한 밤을 밝혀주게 되었다. 어느 춥지 않은 가을밤에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