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용불안 2

알고 보니 작은아버지였던 우리 부장님

by Ubermensch





나와 부장님은 본관이 같은 희소한 성씨다.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인 채로, 부장검사와 아기 계장으로 3개월 전 처음 만났다. 사건관계인과 통화를 할 때 X모모검사실 X무무수사관입니다. 라고 희소한 성씨를 연달아 말할 때면, 뭔가 혈연관계인듯한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생각이 들긴 했다. 본관이 같다는 사실은 서로 알고 있었으므로 항렬이 누가 더 높은가에 대해 처음부터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부장검사와 7급 계장인 사회적 신분 차이가 있으므로 내가 고조할머니쯤으로 더 높은 항렬이라 할지라도 부장님께 저를 할머니라고 불러보세요,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용불안 상황에 처한 지금, 곧 내 원소속 부서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이므로 문득 우리 부장님과 나의 관계를 명확히 밝혀보고 싶어졌다.


부장님 자녀분들의 특이한 돌림자와 내 남동생 대의 특이한 돌림자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장님과 우리 아빠의 이름의 공통자가 없으므로 우리는 다른 파인줄 알았다. 이 부분을 명확히 밝혀보고자 부장님께 여쭈어 봤더니, 족보에는 다른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고 사실은 우리 아빠 대의 항렬자를 사용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게다가 부장님의 아버지와 우리 친할아버지도 같은 항렬의 같은 돌림자를 쓰는 사실까지 확인되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3대는 같은 항렬자로 일치했다. 희소한 성씨의 같은 본관일 뿐만 아니라 같은 파의 바로 위아래 세손 사이었던 것이다. 부장님은 우리 아빠 대인 41세손 나는 42세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장님께서는 바로 나에게 작은아버지라고 부르라며 호부를 허용하셨다. 나는 냉큼 작은아빠 저랑 차 바꿔주세요, 했다. 부장님 차는 제네시스고 내 차는 10년 묵은 누더기 탈것이다. 부장님은 좀전까지만 해도 우리 ㅇㅇㅇ파 42세손이라고 둥기둥기 하셨으면서, 제네시스는 넘겨줄 수 없다고 하셨다. 실망이다.


우리가 족보상 몹시 가까운 혈연관계였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된 부장님은 사내에 이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누가 보면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고. 딱히 내게 별다른 혜택을 주시는 것도 없고 내 간식만 뺏어 드시면서 좀 황당하다. 차도 안 바꿔주시면서. 어차피 부장님도 나도 부서에서 막내라 내 근무지원 종료를 막을 힘은 서로에게 없지만, 어제자로 더욱 끈끈해진 우리는 본소속인 방장 잃은 계장님이 내 자리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내 자리로 오기 싫게끔 엄청난 규모의 기획부동산 사기사건 피의자 36명이 엮인 인지수사 계획을 세우고 부서 내에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트렸지만, 사실 그 근본은 전국 경찰 수백 명이 매달려 고생한 사건을 중도에 빼앗아와 우리 둘이 수사하자는 계획이어서, 이런 민감한 시기에 경찰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자칫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으므로 송치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부장님은 상부에 나를 교체하면 병가를 쓰거나 퇴직을 해버리겠다는 패를 꺼내들면 어떨까 제안하셨는데, 우리방 미제는 어차피 몇건이 안남았기 때문에 다른 검사실로 재배당 부담이 크게 없어서 별로 위협적인 패가 아니라 의미가 없었다.


대신 나는 단장님께 가서 내가 새로 익힌 발레 공연을 선보이고 저를 돌려보내지 말아 주세요, 어필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부장님은 그러면 당장 내일자로 내 본 소속 부서로 돌아가게 될 거라며 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묵살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최후의 수단으로 부장님과 제가 단장실에 함께 올라가 사무실 집기를 부수며 깽판을 치고 떼를 써보자고 했더니, 그러면 나뿐 아니라 둘이 함께 멀리멀리 가게 될 것 같다며 그 제안마저 거부하셨다.


한편, 다른 부장님의 퇴직으로 방장을 잃은 우리 부서 본발령 소속의 계장님은 최근 모친상을 당하셔서 안 그래도 마음이 안 좋으실 텐데, 새파랗게 젊은 유일한 근무지원 계장을 남기겠다고 본인을 느닷없이 다른 부서로 보내면 마음이 더욱 안 좋으실 것 같아서, 총 책임자인 단장님께서도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실지 고민이 많으신 것 같다. 현 상황에서 우리 부장님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나는 심심해서 부장님께 쪽지를 남겼다.






부장님 제가 부담을 드리려는 건 아닌데요. 저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제 세상에 ㅇㅇㅇ파 41세손은 부장님 뿐인 거죠. 회사의 또 다른 자식 같은 ㅇㅇㅇ파 42세손인 제가 쫓겨가지 않도록 힘을 잘 써주셔야 합니다.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니에요. 제 친동생 같은 ㅇㅇ이(부장님의 딸)의 수능 대박을 기원합니다.



keyword
토, 일 연재
Ubermensch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