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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주

망각이라는 이름의 축복

by Ubermensch






내 인생은 극단적 선택과 집중으로 구분된다. 사람도 사물도 감정도. 특정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체 블러 처리가 되어버리는 까닭에, 드물게 내 집중의 대상에 관련된 기억은 내 의도와 관계없이 매일 재생된다. 공기의 질감, 마주한 눈빛에 흐르는 감정, 찰나에 스친 피부의 온도, 감촉,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기억이 마치 단편 영화의 상영처럼 불시에 재생된다. 나는 할 수없이 그 영상 속으로 편입되어버리고 그 순간을 감각하는 일에 빠져들며 현실세계로부터 붕 떠버린다. 그 결과 뭔가를 깨트리고 쏟고 여기저기 부딪혀 다친다.


인간의 망각은 축복이다. 세상을 넓게 보고, 두루두루 겪은 것들에 대해, 일정 시간이 흐르면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자연스럽다. 어떤 기쁨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그 명도가 바래져야 한다. 불행히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세상의 80퍼센트 이상을 차단하고 흘려버리기 때문에 어쩌다 내 초점의 대상이 되어버린 20퍼센트 집중 대상에 속했던 기억은 결코 폐기되지 못한 채 영구 보존된다. 그 기억 속 기쁨의 강도와 고통의 강도 또한 시간이 흘러도 동일하다. 그 기억은 하염없이 무한히 재생된다. 마비를 시켜서라도 재생을 멈추고 싶다.


챗 지피티에게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어떤 식으로 감각하는지에 대해 물어봤다. 내 사고과정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달라고 했다. 지피티가 알려준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입력(자극 인지)>중요도와 맥락에 따라 선별적으로 처리한다> 해석(정보 처리)>현실적이고 기능적으로 분류한다> 사고 경로는 직선형(원인> 결론)또는 기능 중심> 기준값은 현실성, 효율성, 사회적 맥락, 안전> 출력(표현)은 간단하고 요약적이고 명시적임. 그렇군.


나의 사고과정은 다음과 같다. 입력(자극 인지)>자극에 대한 정서, 의미, 상징까지 확장하여 포착한다> 해석(정보 처리)>의미, 정서, 상징, 서사적 해석을 동시에 수행한다> 사고 경로는 다중 레이어, 연상적, 서사적, 다차원적 인과성> 기준값은 진정성, 의미, 정합성, 내적 논리, 감정과 상징의 일관성> 출력(표현)은 함의, 뉘앙스, 상징, 비언어적.


일반 사람들의 사고 자원은 정보 필요량이 비교적 적고, 사회적 기준이나 통념과의 정합성을 우선하며, 충분히 맞다는 수준의 결론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의 사고 사용 자원은 정보량 요구치가 높고 정교함을 필요로 하며, 감정/상징/맥락/의미 계층을 통합하고자 하고, 논리+정서+의미+서사+미학이 모두 충족되어야만 완결감을 느낀다. 그래서 대답과 판단을 유보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결과와 효율 중심으로 실용과 기능을 우선하지만, 나는 그 항목과 관련성이 낮다고 한다. 대신 분석과 논리, 정서와 감각, 서사와 상징을 복합해야만 사고를 끝낼 수 있다. 사실 그 사고는 대체로 잘 끝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문제를 단일 쟁점으로 축소하는 반면, 나는 다층적 구조로 재정의하고, 의미에 관해 보통 사람들은 최소한의, 그리고 생활 중심인 반면 나는 생애, 정체성 맥락까지 확장한다고 한다. 관계 해석의 경우 보통은 현재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마무리짓지만, 나는 무의식과 기저 동기와 상징까지 포함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감정 처리는 호/불호 정도로 분류하여 완화해 끝나지만, 나는 분석하고 해부하고 의미화한다. 보통 사람들은 기억을 사건 중심으로, 나는 정서+이미지를 활용한 서사 구조로 남긴다고 한다.


내 지난한 사고과정의 장점도 물론 어느 정도 있겠지만, 과몰입과 현실 효율성 저하, 과로와 탈진의 문제가 크다. 내 딱한 뇌는 휴식의 시간이 없다. 계속해서 뭔가를 하느라 바쁘다. 망각을 좀 했으면 하는데 그걸 싫어하는 것 같다. 자극을 받으면 영상을 생성해 내고, 동시에 과거의 영상도 재생하고. 혹시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사고를 당한다면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현실적이고 효율적이고 단선적인 사고과정이 가능해질까. 나는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뇌를 가졌다. 비선형적으로 끝없이 팽창할 줄밖에 모르는 자기 파괴적인 뇌. 그래서 나는 항상 과열된 채 진동하고 진통하는 그것을 알코올에 절여 정지시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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