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호 525호 검사실 사이
나는 524호실에 근무한다. 523호는 김 부장검사님의 집무실이다. 525호는 우리 부장님의 집무실이다. 524호실에는 523호 검사실 짝꿍 계장님과, 양 검사실 업무를 겸해 맡는 실무관님과, 우리 부장님 짝꿍인 나 이렇게 셋이 근무한다. 우리 사무실에는 공통 출입구가 있고, 우리 계장들 등 뒤로 각자의 부장실로 통하는 문이 하나 더 있다. 피의자를 소환해서 조사를 할 때, 그 문을 통해 부장님들이 조사상황을 듣고 계시다가 필요시 관여하신다. 523호 부장님은 피의자의 태도가 불량하거나, 조사가 잘 안 풀리는 것 같을 때 바로 나오셔서 직접 신문을 하시는데, 우리 부장님은 열린 문으로 내 조사상황을 듣기만 하시고 나에게 전적으로 맡기신다. 그 무한한 신뢰에 참 감사할 따름이다. 불만은 전혀 없다.
우리 524호 여자 셋은 딱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부장님만의 규칙이 하나 있다. 공적인 용무일 때는 공통 출입구를 이용해 들어오시고, 사적인(수다, 간식이나 물 드시는) 용무일 때는 내 등뒤로 난 문을 통해 오신다. 한 번은 공적인 용무임에도 내 등 뒤 문을 통해 오시기에, 부장님께 출입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냉혹하게 지적했다. 부장님은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오신 기록을 놓쳐 내 책상 위 물건을 치게 되었고, 당황해하시며 다급히 내 책상을 정리해주셨다.
523호 부장님은 조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면 공통 출입문 앞에 위치한 실무관님 자리 인근에 들러 간단한 용무로 하루에 한두 번 몇 초 뵐뿐인데, 우리 부장님은 하루에 스무 번 정도 양쪽 문을 이용해 우리 사무실에서 거의 생활을 하신다. 마치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북에 번쩍 나타나셔서 정신이 없다. 앞자리 계장님은 우리 부장님이 어차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시는데, 계속 서계시는 것도 힘드니 차라리 부장님 자리를 여기 하나 더 만들어주는 게 어떨지 제안하셨다.
앞자리 계장님이 안타까운 부분은 우리가 사무실을 공유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우리 검사실의 모든 사건을 강제로 파악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 부장님이 하루 종일 내 옆에 서서 사건 이야기를 하셔서 그렇다. 사실상 우리 검사실의 선임 계장님이나 다름없다. 계장님 소속 부장님을 뵙는 것보다 우리 부장님을 뵙는 비중이 100배는 더 많다. 이 수치는 과장이 아니다. 우리 부장님은 내가 부장님 집무실에 정수기를 놔 드리겠다고 5번 정도 제안을 해드렸음에도, 강력하게 거절하시고는 수시로 물을 뜨러 나오셔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하신다. 부장님이 30분 정도 우리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으면, 앞자리 계장님은 나에게 부장님이 이렇게까지 오래 안 나오실 리가 없는데, 혹시 쓰러져계신 게 아닌지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한다.
내가 수사관으로서 업무 비중 중 가장 큰 부분은 수사가 아닌 부장님 응대 항목이다. 이 부분이 싫은 건 아니다. 내가 사교적이거나, 싹싹하거나, 리액션이 좋거나, 예의 바르거나, 아부를 잘하는 성격이 결코 아닌데, 이상하게도 역사적으로 나와 함께 일한 검사님들은 나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서, 딱히 내가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던 그분들의 일상과 생각과 신변잡기와 사건과 기타 나의 교육용 이야기를 잔뜩 해주신다. 이제 익숙해져서 나도 재미가 있고 그 주제가 몹시 광범위하기 때문에 듣다 보면 나의 좁다란 세계가 크게 확장돼서 즐겁다.
어제 마침내 부장님과 나의 가까운 혈연관계가 밝혀졌던바, 부장님은 이 사실이 회사에 알려지면 절대 안 된다고 내게 주의를 주셨다. 매주 목요일은 523-525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우리 부장님은 523호 부장님께 사실 우리는 어느 가문의 어느 파 41대손-42대손 관계요, 하고 대뜸 밝히셨다. 나는 그건 비밀이고 제 차랑 부장님 제네시스랑 바꿔주지도 않으셨으면서 그런 얘기는 왜 하시냐고 대꾸했다.
내 등뒤로 하도 부장님이 수시로 나타나셔서, 부장님. 부장님도 보편적인 평범한 부장검사님들처럼 조금 권위적이고 근엄하게 집무실에 앉아계신 채로 보고를 받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고 여쭈어 봤다. 부장님은 권위적이게? 하시더니 에헴. 나는 어느 가문 어느 파 세바스찬 42대손 ㅇㅇㅇ이다.라고 귀족적인 자기소개를 하셨다. 여기서 세바스찬은 급조해서 지어내신건줄 알았는데 부장님의 세례명이라고 한다. 나는 곧바로 부장님, 42대손은 저고요. 부장님은 41대손이세요. 하니까 아참 그렇지 하며 다시 근엄하게 긴 자기소개를 낭송하셨다.
그 웅장한 자기소개가 입에 잘 안 붙으시는지 계속 버벅거리시기에, 부장님 그냥 부장님 AI친구들한테 장엄한 음악과 함께 녹음해 달라고 해서 여기 들어오실 때마다 배경음악으로 틀어달라고 하세요, 했다. 부장님이 이후 몇 번이고 그 권위적이고 귀족적인 자기소개를 버벅거리며 반복하시길래, 나도 따라 했다. 저는 같은 가문 같은 파 엘리사벳 42대손 ㅇㅇㅇ입니다. 하고. 여기서 엘리사벳은 내 세례명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시던 앞자리 계장님은 어휴 저 환상의 콤비를 어떻게 떼어놓냐며 내 고용불안 상황을 다시 상기시켜주셨다.
낮에 카페에서 저를 복귀시키지 말아 달라고 단장님께 얼마 전 발레에서 배운 애절해 보이는 팔동작을 선보이며 애걸해 보는 건 어떨까요 하며 팔을 흐느적거렸더니, 차가운 계장님은 내 팔동작이 소금쟁이 같다고 비아냥거리셨다. 그건 내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서 팔을 쭉 펴지 못한 채라 그렇다. 보편적인 평범한 부장검사님인 523호 부장님은 이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하셨다.
앞자리 계장님은 계장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보다 아스트로 빈이의 죽음이 더 슬프다고 했다. 나는 항상 내가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의심했는데, 524호에서만큼은 소시오패스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계장님의 아버지는 살만큼 사셨다고 한다. 언제 작고하셨냐고 물었더니 70세라고 하셨다. 우리 아빠 생각이 났다. 내가 돈을 벌고 아빠한테 따뜻한 외투한벌 못 사준 게 생각나 갑자기 눈물이 고여와서 급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우리 524호 대화방이 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한 실무관님이 계장님 어디가서 눈물흘리고 계시는거 아니죠 하고 대화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계장님께 왜 그런 주제를 꺼냈냐며 소시오패스라고 비난한 뒤 차에서 조금 울고 가겠다고 했다. 계장님은 자식들은 7세 이전 평생 효도를 다 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며 이런저런 달램 비슷한 것을 해주시는가 싶더니 문자를 쓰는 게 불편하다며 얼른 사무실로 돌아오라고 했다. 나는 이 주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를 하고서야 울음을 그치고 사무실로 갔다.
예쁜 실무관님의 이상형은 소금우유상 남자라고 한다. 나는 선이 굵은 부리부리상남자를 좋아한다. 우리는 남자로 싸울 일이 없겠다고 했다. 주제가 흘러 흘러 앞자리 계장님이 사주분석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게 생년월일시를 불러보라 하더니 나는 물인데 화가 너무 과하고 목이 없으니 최대한 표현을 하랬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몸도 쓰랬다. 그러고선 갑자기 나는 부모님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셨나 보네 한다. 사주에 그런 게 있다고 했다. 계장님은 불과 두세 달 전 처음 만난 사이로, 내 사적인 정보를 전혀 모른다. 내 생각에 우리 엄마 아빠보다 나를 더 사랑한 건 돌아가신 우리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줄 알고 나를 어루만지고 어르고 달래며 내가 아까워 어쩔 줄 모르던 두 분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또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회사에서 호부(呼父)를 허락하는 작은아버지가 직속상사고. 상냥하고 예쁜 실무관님은 지각이 잦은 내가 출근점검에 걸리지 않게 사전정보를 알려주고. 비록 내 애절한 팔동작을 소금쟁이라고 비하하긴 하셨지만, 본인과 전혀 무관한 옆방 아기계장이 뭘 모르는 것 같으면 발 벗고 나서서 다 알려주시는 든든한 선배 계장님도 앞에 계시고.
요즘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올라 꼭 대낮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