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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불안의 해소

인생의 전개는 아무도 모른다

by Ubermensch







우리 중요경제범죄조사단 소속 부장님 한 분의 사직 예고로 방 하나가 폭파될 예정이었고, 방장을 잃은 우리 부서 본소속 계장님과, 다른 부서 소속 유일한 지원인력인 나의 고용불안이 몇 주째 지속되고 있었다. 사실상 고용불안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폭파된 방에 홀로 남겨진 계장님은 원래 이 부서 소속이니 어느 다른 방으로 새로 배정될 것이라 믿어서 전혀 고용불안과는 무관한 상태일 것이라는 객관적 의견을 전해 들었다. 게다가 최근 내 본소속 부서에서 곧 나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언제 돌아오냐는 재촉을 수시로 듣고 있는 실정이다. 부장검사와 계장 1:1 체제를 이루는 이곳에서, 부장검사님 한 명이 떠나는 상황에 계장이 두 명 있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므로, 나는 잉여인간이 된 것이다. 굳이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하등 없다. 나를 돌려보내고 내 자리를 방장 잃은 계장님이 대체하면 다시 부장과 계장 1:1 체제로 꼭 맞춰진다.


다만 문제는 우리 방장님인 부장님과 나, 실무관님, 그리고 사무실을 공유하는 계장님까지 우리 524호 공동체의 유대가 너무나도 끈끈하고 견고해서, 이걸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고용불안의 근원이었다. 사실 내 본 소속 부서도 원래 대검이나 법무부 출신만 받는다든지, 빽이 있어야 갈 수 있다든지 하는 소문이 들리는 굉장한 선호 부서다. 그래서 사실 돌아가도 업무적으로는 부담이 없다. 지원 나와 있는 이곳이나, 내 본소속 부서나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쾌적한 곳이다. 그렇지만 나는 일이 적고 여유로운 부서를 특별히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일이 많고 험하고 야근을 많이 하는 부서도 상관이 없다. 평이한 사건인데 건수가 많으면 그만큼 경험이 쌓여서 좋고, 지금처럼 까다로운 사건이되 건수가 적으면 품을 많이 들이고 공부도 해가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고. 나는 어디를 가도 별 불만이 없이 적응을 잘하는 편이다. 문제는 누구와 일하느냐다.


나는 업무의 질이나 양에 개의치 않는 선량한 수사관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불만이 없다. 수사관으로서 사건이 있고 수사만 하면 된다. 다만 사람을 가리는 사람이기에, 미지의 구성원에 대한 공포가 있을 따름이다. 본소속 부서에서 내가 지원인력으로 차출되기 전, 2일 3시간을 근무하고 이곳에 불려 왔다. 이후 나를 잊지 말고 복귀시켜 달라는 차원에서 그쪽에서 주최하는 지식재산연구회 등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곳 구성원도 배울 점이 많고 훌륭하신 분들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나에게 싹싹하고 늠름한 또래 후배들도 있고. 곧 독립해서 방을 꾸린다는 아기 검사님이 잘생겼다는 제보도 들었다. 여기는 노인정 소리를 들을 만큼 계장님들도 검사님들도 다들 연배가 높으시기 때문에, 또래와 일하는 근무 환경과는 아무래도 분위기 차이가 좀 있기도 하고, 경력이 미천하고 홀로 30대인 내가 있기엔 조금 부자연스럽긴 하다. 다른 선배님들도 네가 왜 거기 속해있냐고 물어본다. 나도 모른다.


어쨌든 며칠 전 우리 부장님께 내내 고용불안 타령을 하던 내가 느닷없이 초연한 태도로 저는 본 소속 부서로 가도 별 상관이 없다고 한번 말해봤다. 곧 독립 예정이라는 아기검사님도 잘생겼다고 하고, 귀여운 후배 계장이 선배님 언제 오시냐고 하는 게 기분이 썩 괜찮았기 때문이다. 내 미련 없는 태도를 마주한 우리 부장님은, 우리 청에 오신 지 3개월 밖에 안되셨으면서 느닷없이 당장 내년 초 인사 때 제주지검을 지원하겠다고 하셨다.


부장님은 퇴직준비의 일환으로 형사법 문제집을 제작할 계획을 세우시면서 내게 공저를 요청하셨다. 나는 처음에 그 책이 안 팔릴 것이 뻔해서 단호히 거절했다. 수험서는 전통적으로 유명 강사들이 만든 유명 문제집이 정해져 있는데, 어느 수험생이 처음 들어본 부장님이 만든 문제집을 사겠냐고 했다. 내 신랄한 지적에 앞자리 계장님과 옆방 부장님은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하지만 부장님은 퇴직 후 변호사 개업 시 홍보 목적이라며 제작 의지를 굽히지 않으셨다. 이후 내게 몇 번이고 공저 제안을 하셨다. 약간 나를 홍보 목적으로 이용하시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부장님은 저자에 우리 성씨가 나란히 있으면 보기도 좋고, 하시면서. 우리가 ㅇㅇ가문 ㅇㅇㅇ파 41대손 세바스찬과 42대손 엘리사벳으로 끈끈한 유사부녀 혈연관계임을 주지시키셨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그 형사법 문제집이 안 팔릴 걸 알면서도 결국 제작에 협조해 드리기로 약속했다.


나를 빼앗길 위험에 처한 우리 부장님이 난데없는 제주지검 지원이나 퇴직 타령을 하시기에, 부장님 저는 내년에 회사가 망하고 부산지방중수청에 갈건데, 제가 어디 연줄이 있다면 부장님을 부산지방중수청장으로 모셔드리면 좋겠어요. 했다. 부장님은 그런 나를 비웃으며 당장 다음 주에 본인 앞길도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누가 누굴 중수청장 시켜준다는 거야. 본인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 하셨다. 옆방 부장님께서는 내게 방장이 끌어안으면 그방 계장이 남을 가능성이 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고작 검사-계장-실무관 3인으로 돌아가는 공장에서 공장장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부서 내에서 우리의 공장은 가장 생산력이 뛰어나다.


오늘 우리 부장님이 연가로 부재중인 사이, 새로운 배치표가 게시됐다. 의외의 결과였다. 폭파된 방 계장님은 현재 부서의 다른 방장님 방으로 배치되셨고, 나는 지금 우리 방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제3의 계장님이 난데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우리 방장 부장님이 나를 힘껏 끌어안은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이해관계가 얽힌 것인지, 아니면 임시조치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몇 주간 지속되었던 고용불안 상황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나는 얼마 전 수레에 싣고 낑낑대며 사무실로 옮겨온 커다란 동백나무에 물을 듬뿍 줬다. 어쩌면 이곳에서 동백꽃이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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